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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시인의 시...

부산인터넷뉴스 2007. 4. 14. 02:48
[【교안강봉환교수】] 김정란 시인의 시 훔쳐보기-(김정란시의 페미니즘)


* 분석 작품집 :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매혹, 혹은 겹침} (세계사, 1992)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세계사, 1997)

* 참고 자료집 :

김정란(평론집), {비어있는 中心-未完의 詩學} (언어의세계, 1993)
김정란 사회문화에세이, {거품 아래로 깊이} (생각의나무, 1998)



- 글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김정란의 텍스트(시와 비평문)에 큰 비중을 차지한 페미니즘 경향은 우리 문단에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여성시의 한 전형을 이룰 정도로 특히 여성 시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글은 김정란 시의 비밀을 페미니즘(여성성주의)1) 차원에서 재구·분석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페미니즘 이론>을 비롯한 몇 사람 페미니스트들의 간단한 이론과 함께,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의 작품을 논한 비평문을 인용, 검증할 필요를 느낀다. 김정란 비평집을 검토한 결과, 그녀가 본느프와의 시에 대한 애정과 작품 분석에 상당히 공들인 흔적을 통해 글을 작성 시, 큰 도움을 받았다.

우선, 프랑스의 여성 페미니스트들, 크리스테바Kristeva·식수스Cixous·이리가레이Irigaray 3인의 공통점(이론)에 접근해서 개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 전제는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이 아직은 서구 문단이나 우리 문단에서 핵심적 주요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징후2)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이 경향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을 페미니즘 이후의 신예 이론인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위험한 전제일 것 같다. 잘 알다시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 데리다Derida와 라캉Lacan에 우선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설 현상학의 철학적 <해체>를 주장한 데리다는 '텍스트의 세계란 시작과 끝이 없는 연쇄의 연기(緣起) 법칙으로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어딘가에, 즉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미 있는 텍스트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3)는 작은 결실을 보여주고 있어 믿음직하다.

그렇다, '우리가 존재하는 어딘가에'서의 '우리'를 본고에서는 '여성'으로 읽기로 하자. 실상 '남성들에 대한 성적 매력'을 뜻하는 여성성feminity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미 있는 텍스트'란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타자로서의 여성>4)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으로의 승격과 같다. 이것은 크리스테바 중심의 이른바 페미니즘 사상의 결론 단계이기도 하다. 특별히 그녀의 탐구정신은 정신분석학을 바닥에 깔고 출발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현대 언어학의 모순이란, (현대 언어학이) 남성적 상징(=<상징적 질서>)의 질서로 여성적 상징(=<기호적 질서>)의 질서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이를 전도(顚倒)시켜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반발한다. 설득력 있는 그녀의 이러한 <중얼거림>5)이란 용어는 푸코가 우연히 처음으로 뱉은 말인데, 페미니즘에 관한 원만한 논의(전개)의 이해를 위해 이 부분을 오려내 보기로 하자.

우리가 단어들을 파괴할 때 남게 되는 것은, 단순한 잡음이나 자의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단어들(이 단어들도 마찬가지로, 파괴되면 또 다른 단어들을 해방시켜 줄 것인데)이라는 생각―이러한 생각은 근대언어과학 모두가 지니는 부정적 측면인 동시에 우리가 이제 언어의 가장 모호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힘을 베껴낼 수가 있는 신화이기도 하다. 언어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자의적인 까닭이요, 우리가 언어의 의미 획득조건을 규정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 안에서 끊임없는 중얼거림(문학은 이러한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지는데)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스스로 말하기를 그친 적이 한번도 없던 까닭이요, 인간이 언어의 내부에 침투한 바로 그만큼 언어 역시 인간의 가치에 의해 침투되는 까닭이다. ([분절화]에서, 고딕 표기:글쓴이, 이하 같음)

이곳에서 말하는 '신화'란 진보적 가능태로서의 그것이다. 이제 신화는 끝났다고 믿어두자. 새로운 신화의 출발이 절실하다. '언어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모호한 듯하지만 결국 그 언어가 일정한 의미의 묘목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마다 '이름'을 가진 존재로. 푸코는 앞글에서 '우리가 단어들을 파괴할 때 남게 되는 것은, 단순한 잡음이나 자의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단어들'이라면서 '우리가 이제 언어의 가장 모호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힘을 베껴낼 수가 있는 신화이기도 하다'고 전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어를 끊임없는 중얼거림(문학은 이러한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지는데)으로 표현한다는 데 있다. 그냥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푸코식(式) 끊임없는 중얼거림이다. 아니, '문학은 이러한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말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필자가 본고를 작성케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즉, 푸코의 문학론에 김정란의 시론이 맥을 함께 한다는 전제 하에, 김정란 시(詩)의 푸코식 <중얼거림>을 일부 탐구코자 한다. 김정란은 시종일관 중얼거린다. 그녀가 외친 언어의 해방은 인간 정신의 해방으로 직결하기도 한다. 잘 안 보이는 보편적 욕망의 탈출구, 훤히 보이면서도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곳―. 이곳을 들락거리는 존재들에 대해 그녀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다가, 자기 탈출과 감금을 반복하는 존재에 대해 속삭이기도 한다. 처음엔 <중얼거림>으로 일관한다. 엄청난 불만을 고통을 온몸을 던져 막으며 그녀의 적들과 싸웠다. 나중에는 (그녀와 적대관계에 놓인) 저들에게 <속삭임>을 들려줄 줄 아는 여성으로 변모하기도 한다.6) 그러나 그녀에게 이 두 가지는 별개로 존재치 않는다. 상대어인 서로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변모를 두려워하지 않는 김정란은 매력적인 여성이다. (광주 문학세미나7))

그러나 궁극적으로 김정란 시는 비밀스러운 내면의 속삭임이 확실한 것 같다. 시에서 갖은 언어적 구걸(!)이 이를 반증한다. 입술이 집요하게 다가가는 대상, 그 절대적 남성성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시적 화자의 욕망은 오늘도 '매혹, 혹은 겹침'으로 낯선, 길들지 않은 우리의 가슴을 향해 쉴 새 없이 노크하고 있다, 뜨겁게.


- 중얼거림과 속삭임, 그리고 <달걀론>

푸코는 어떤 형태로든 '명명nomination'이란 것이 단어의 고유 책무라고 보았다. 김정란은 이 견해에 매우 동조하는 것 같다. 그녀 나름의 언어학에 따른 것일까, 기호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크리스테바(그녀는 페미니스트란 호칭을 거부한다)의 글쓰기는 주체성을 근저로 하는데, 이 또한 김정란의 시 쓰기에 다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데리다Derida는 절대적인 합리를 지향하는 논지를 제시한다. 데리다의 텍스트론은 나의 <달걀론>과 통하고 있다. 의미 중심에 노른자핵이 내재하면서 그 의미를 다시 감싼다..., 그리고 다른 의미의 생산을 위해 또 다른 (의미의) 부화를 서두른다.... 연속적 동류항(=의미)이요, 의미의 가닥을 종국에는 하나로 매듭짓는 끈이 되는 그의 텍스트론. 이 중에서도 김정란이 특히 크리스테바의 견해에 관심을 두는 점8)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이해는 {제2의 성} 저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의 이해가 우선한다는 점9)을 강조하는 바이다. 나는 이 말을 글의 진행 방향상,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10)으로 삼고 싶다.

엘렌 식수스H. Cixous의 남성중심적 글쓰기(정신분석학상 남근으로 표상되는 생식기와 리비도적인 조직에 사고의 깊이를 둠. 이것이 여성적 글쓰기마저 지배해왔다고 생각하고 있다)에서 그녀(식수스)의 남성성은 '이 우주의 통합된, 자제력 있는 (무소불위의) 중심'11)이다. 또 남성은 타자인 '남자/아버지, 남근의 소유자인 나와 관계를 가질 때만이 (여성적) 의미를 갖는다'12)는 극렬.단세포적 존재이므로, 그녀는 이러한 정의가 싫다. '남근중심적 글쓰기'라는 냉소적 문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보자. 다시 말해서 식수스는 남성/여성의 대립이라는, '남성은 자아이고 여성은 그의 타자'13)라는 양극적 이분법을 극구 배척한다. '여자는 반드시 남자의 타자로 엄연히 존재한다'가 그녀의 페미니즘 중심 사고(思考)다. 여기서 일컫는 '타자'란, 모든 면에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지금까지 소홀히 취급해왔던 대남성적 존재―'여성만의 것/물질/존재론'을 글로 확실히 옮길 것을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강력히 권하고 있다.

물론 엘렌 식수스나, 페미니스트란 칭호를 좋아한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 또 크리스테바 모두는 여성에게 대남성적 억압적인 사고로부터 당연하고도 철저히 진정한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14)고 강조함으로써 자신들 모두는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또 식수스가 여성적 글쓰기를 모든 삶의 규범을 변화시키는 '선행적 움직임'15)으로 바라본 태도와 그 저의(底意)도 주목하기로 하자. 물론, 김정란이 문화이론가이자 정신분석 의사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그녀는 소쉬르의 언어와 기호 체계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신분석학,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고자 했다)과 이브 본느프와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예증한 논문을 일독해 보면, 누구나 이런 단안을 내릴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내에서 다루었던 페미니즘의 요체(要諦)를 별항으로 분리, 차례로 검증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정란은 프랑스의 이브 본느프와의 작품 분석에 열정을 쏟은 적이 있다. 김정란에 의하면, 본느프와 시집 '{두브의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에 대하여}(1953)로부터 최근작 {빛 없이 있었던 것}(1987)애 이르기까지' (...) '본느프와가 한결같이 천착하는 주제는 <장소lieu>에의 접근'16)이라고 명시한다. 장소란 하나의 방향 설정이다. 구체성에 비해 현실성이 희박하다. 신화 속 처소가 되기도 한다. 본느프와는 이곳에서 자기 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17)하고 있다. 그녀 시 이해의 중요한 의미를 풀어주는 열쇠라고 하겠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장소에 대한, 예를 들면 헛되고 탈색된 모습의 이곳과 실체로 풍부한 다른 곳-아니, 오히려 다른 <저 곳>-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은, 오늘날 돌이켜 보면 초월성에 대한 직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이어서, 자신의 글쓰기를 '<그노시스>는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첫번째 경향이었던 것'으로 술회18)하고 있다. 혹시 김정란과 본느프와 시작법과는 어떤 관련이 없을까. 이처럼 제반 문제들에 착안하여 김정란의 시편을 분석, 그녀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특정어가 어떤 형태로 등장하여 내재어(內在語)로 쓰이는지 규명해 보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사물 바라보기의 비밀이 비로소 규명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그녀 작품에 흔적으로 일관한 '여성성Feminity'19)의 행로와 갈래를 짚어보기로 하자.


- 시집(작품) 분석

김정란 시는 '나비'가 자주 등장한다. 제목이 있는 시 [나비의 꿈]은 김정란의 '나비'의 베일을 한꺼풀 벗기고 있다. 이를 박혜경은 산문식·대화식 흐름(시)을 간추려 아래와 같이 날카롭게 풀이한다.

①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그가 말했다.
"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꿈꾸는/핵 //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② 김정란의 시가 추구하는 가장 커다란 관심의 대상은 자아의 존재론적 본성과 그 절대 순수성의 회복에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녀에게 외부 세계는 선택적인 거부가 아니라 전면적인 거부의 대상이다. 자아의 본질적 순수는 그녀에게 나비와도 같은 가벼움으로 감지되며, 그 본질의 <꿈꾸는 핵>은 <각질의 삶, 각질의 언어>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20)

시적 화자는 제2의 나비다.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 나비더러, 화자는 '가능하면 더 깊은 곳'으로 찾아들라고 주문한다. 친애, 곧 사랑의 표시다. 화자와 타자 사이가 조금 모호하지만, 아무튼 '그'는 화자인 '나'의 '수줍은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 (장면 소개-그리고 '그'가 날아간 뒤 남는 핵.) '꿈꾸는/핵'으로, 아주 미세한 잔영으로 남는 '그'의 '핵'. 김정란은 매혹적 존재로서의 나비를 이미지로 생산해낸다. 이젠 타자로서의 나비가 등장―'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한다. '돌짝밭'은 험난한 삶의 과정을 보여준다. 어려운 몸짓으로 조심스러이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매력적 존재인 이 나비는 혹시 김정란 자신일지도 모른다. 시 속에서 '나비'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므로 박혜경이 김정란 시를 '자아의 존재론적 본성과 그 절대 순수성의 회복'에 있다는 지적은 새겨둘 만하다. 또한 <거부>라는 이미지를 도입, 그녀의 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각질의 삶, 각질의 언어>'라고 간명히 정리한 점도 신선한 비평안이라 하겠다.

참고로, '나비'의 신화적 쓰임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의 경우는 죽은이의 영혼이 나비로 환생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며, 삼월 삼짇날 처음 보는 노랑나비는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도 한다. 또 연인의 표상일 만큼 나비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그런가 하면 '환몽적 화신', 가벼움과 변덕스러움, 정신분석학상의 부활, 영혼을 의미하는 프시케Psyche, 불멸의 인간 영혼을 상징한다. 융Jung은 '변신'의 한 형상으로 보기도 했다.21) 이를 정리하면 인간의 의식 속의 나비는 대체로 영혼 세계를 넘나드는 형이상학적 아름다운 표징이다. (나는 빨간 꽃잎에 앉아있는 노랑나비를 보면 환상에 곧잘 빠진다. 장자의 <호접몽> 주인공 역시 노랑나비가 아닐까.)
이에 관한 고백이 있다. 들어보자.

시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결국 생짜로 쓰는 형이상학, 체계가 되지 않는, 될 수 없는, 되기를 거부하는, 늘 현장에 있는 영혼의 인식.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내 내면의 타자의 예감을 기록하는 것이었다.(120)

나는 '말'에 대한 인식을 덧붙였고(어쨌든 나는 종교가 가 아니라 시인이므로), 그리고 여성적 존재의 차원을 가미시켰다. 당연히 그것은, 십자가의 성요한의 도정과는 달리, 육체를 재인식하는 존재론이다. 여성의 존재론은 육체의 의미를 절대로 배제시키지 않는다. 적어도, 나의 존재론적 입장은 그렇다.(122)

그녀는 자신에게 '형이상학'이고 '늘 현장에 있는 영혼의 인식'이며 '내면의 타자의 예감을 기록하는 것'(존재)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자기 시에 '여성적 존재의 차원'을 포함시키기로 작정하고 '육체를 재인식하는 존재론'으로 정리한다. 자기 시의 페미니즘 성향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 격렬한 자아부정에서 출발한 나는, {매혹, 혹은 겹침}에서 타자의 자아에의 겹침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나를 찾기 위해서 내 안으로 들어간, (세번째 시집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는) 타자에 합일된 자아 재통합의 단계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122-123)

세기말이 온다. 21세기에는 강렬한 영성에의 갈망이 되돌아 올 것이다. 사람들은 지성의 젓가락을 깨작되며 시시하게 사는 데 지쳐 있다. 이제 바보들의 시대가 온다. 각자라는 심연을 건너는 바보들. 끝까지 사랑하는 바보들의 시대가.22) (123)

네 단락을 함께 풀어보자.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가 '격렬한 자아부정에서 출발'한다는 실토는, 거꾸로 나비라는 제2의 타자를 통한 어떤 상승 효과(기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말한 '격렬한 자아부정'의 몸짓이 곧 '나비'라는 상징물로 형상화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몸짓은 다시 '강렬한 영성(靈性)에의 갈망'의 현현이다. (그런데 왜 '바보들의 시대'라고 했을까. '각자'라는 개인주의에 집착해 있는 멍청한 바보들? 세기말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녀가 전망하는 21세기는 똑똑한 바보지식인들의 천국이며, 그 안에 속한 자기 자신 또한 강렬한 영성을 갈망해보지만 결국 바보가 될 것이므로 자기 부정 정신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설득력 있다.

그렇다면 김정란의 나비는 극단적 절망의 날개짓이다, 화자의 몸부림은 착점이 뻔한 위치인 만큼 자신의 제자리뛰기 자세가 우스꽝스러울 것은 명약관화하다. 비극, 이것이 시를 바라보는 김정란의 원초적 시선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계속해서 통통 튄다, 날려고 한다. 현실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영성을 위한, 영성을 향한, 비틀려 아찔한 날개짓을 하고 있다. 자연히 몽환적인 상태의 혀가 몸부림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자 김정란의 본성이나, 정반대인 강렬한 영성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스물네 살) 시의 화자는 취한 채로 시의 길을 비틀대며 간다. 두 눈은 그러나 영성의 세계를 향하고, '나는 예쁘게 예쁘게 부서져 내렸어./바람 랄랄랄 바람'([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이라고 읊조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비는 절벽에 부딪힌다.' 영혼은 고적함으로 흔들리고.

나비는 절벽에 부딪힌다. 그의 등 뒤에서 밤이 일어섰다.
고적함으로 흔들리는 영혼들. 나는 맥을 놓는다.(앞시)

이러한 자기부정 정신은 벽 속으로 사라진 Z씨가 등장하는 [우리의 패배주의]에서도 쉽게 읽힌다. 일종의 시니시즘([이 시대에 살기] 포함)의 시다. 그를 '적의'로 바라보는 화자. 느닷없이 Z씨를 만나면서 화자는, 혹시 우리 내부에서 은밀히 '엄청나게 커져버린', '우리가 키운 Z씨'가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김정란은 이 엄청난 존재의 등장에 대해 거부하며 자기 내부에 어떤 '결핍'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결핍을 베어내리라 베어던지지라
내가 칼인 詩를 가지리라([詩와 힘])

한때 '독'이었던 시([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가 이 작품에서는 '칼(나)'이 된다. 그녀는 이제부터 격렬히 저항한다. 아니, 전면에 선뜻 나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지옥에서]는 빼어난 작품이다.

감기, 내 삶에 대한 내 삶 전체의
징후, 내 기질이 내 삶에 대해 가지는 관계,//
(...)//기침을 하며, 안에서 우리의 삶을
밀어내며 가까스로
우리는 말했다,
그게 어디니.//
그러나 밤에 기침은 심해졌다. 홀로 있을 때
내성의 번쩍이는 칼이
우리의 삶을 사정없이 우리의 바깥으로
내몰았다.

이 시는 감기 걸렸을 때의 몸살을 그린 작품이다. 김정란의 감기란, 몸의 부분적 앓음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내 삶 전체의/징후'다. 기침 행위를 단순한 몸의 살(煞)로 보지 않고, '삶의 몸살'로 보는 점이 탁월하다. 그러나 여전히 주변은 불안한 상황이다. (시집의 중반, 지금 김정란은 위험하다.) 그녀는 나의 병 앓기를 '언제, 내 삶이여, 나를 늘 바깥에서 조여오는 형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 [나의 병.1](-자가 진단, 반성을 위하여]) 일부를 보자.

언제, 내 삶이여, 나를 늘 바깥에서 조여오는 형식이여,
언제 내가 그대라는 옷 속을 채우는
체적이 될 때까지, 지금은, 이 명목 없는
모반을, 텅 빈 알맹이로부터,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밀어내는 이 기약없는 안에서의 집짓기를 용서하라,

그러나 그녀의 시가 희망적인 것은 끝의 두 행에 있다. 기약 없지만 '안에서의 집짓기'를 시도한다는 전향적 태도―이 끝없는 지향성이 그녀의 시를 믿게 한다. 이것이 [나의 병.3]에서는 중증인 '광기'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바짝바짝 여위면서 나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不在中. 삶이 조금씩 꽁무니를 감추고
나는 不在中, 아픔도 없이, 턱까지 차오르는
狂氣를 향해 천 천 히
돌아선다. 알고 있었어.
진작부터.([나의 병.3])

'나'의 본질은 지금 '부재중'이고, '아픔도 없이, 턱까지 차오르는/광기' 상태다.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고 '부재'와 '광기'에게 엄포를 놓지만.) 급기야 [나의 병.4]에서는 '지금은 당신을 등지나이다, 통촉하소서, 나의 존재여'라고 부르짖는 화자가 매우 위태롭다.

그렇다면, 이 시집은 계속해서 김정란 말대로 정말 '격렬한 자기부정'으로 모든 상황을 끝내고 있는 걸까. 과연 '내게 자아는 넝마'일 뿐인 걸까.23) 그렇지는 않다. 그녀는 [나의 (詩)]라는 특이한 제목을 통해 이제부터 '자기 부정'을 반격하기 시작한다. 자기 부정의 부정이다. 이 시의 부제로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가 붙어있음에 유의하자. 각질(角質)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지나가면 벗겨진다, 가루로 비듬으로. 다만 지금은 단단하다.... (지금 당장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제목 안의 '詩'의 몸에다가 왜 갑갑한 소괄호를 입혔을까. 한 마디로 김정란식 '각질'이다. 그녀는 지금부터 딴딴한, 이 알 수 없는 껍질을 벗어내고자 능동적으로 애를 쓴다. 이 구절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위의 부제(副題)를 환치하여 풀이하면, 현재 화자를 옭아매는 '각질의 언어를 어떡해서든지 벗겨내면, 딱딱한 내 삶도 부드러워질 것이다(유연해진다)'는 의미 전이가 가능하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시의 몸을 붙들기로 작정한다. 자기 시, 곧 빨개벗은 연체동물인 시가 자기(연체동물의) 혓바닥으로 끔찍하게 '아니'라고 말할 때, (연체동물처럼) 비효율적으로 꼬물대며 기어가는 '나'의 원초적 존재―그런데, 그건 달팽이였다! 달팽이가 언제 그곳 종착점을 닿겠는가. '그 기약없는 절대성의 절대 놀이......'

나는 축적된 생명의 모든 물량적 양식을,
형태를 내용을 빠져 나온다. 나의 달팽이는
속살만으로 성벽을 기어내려온다...... 오 그대에게
내 궁극의 기원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결국 '모든 물량적 양식을,/형태를 내용을 빠져 나'오는 화자. 그러더니 달팽이는 속살이 되어 성벽을 기어 내려온다.... 그렇다면 '각질'은 '모든 물량적 양식'과 '형태'와 '내용'이다. 원초적 삶의 화자가 되는 길은 오직 이러한 각질을 벗기는 일이다.

나의 달팽이는 알고 있다. 이 삐그덕댐이
긍정적 징조라는 것을, 혼, 안개 무리, 또는
언어, 우리가 神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에 대한. 感만으로 나의 달팽이는
최소한 지향한다
(길은 도처에 있고 길은 아무데도 없지만)(...)

나의 영혼의 내벽이여 잠재태여 물렁살이여,
그러므로 갈망하는 만큼 네가 되기를,
너, (너)의 창세, 그리고 동시에 (너)의 말세인 너,
그러므로 되기를―될 수 있는 것이.

이 부분은 앞서 말한 대로 세르쥬 위탱의 <그노시즘Gnosism(靈智主義)> 성향이 잠시 엿보인다. 김정란이 추구하는 영성(靈性)의 세계와 맞닿고 있다. (그녀가 바램하는 곳은 영성의 세계다? 고통을 잊고 싶다?) 현실은 '삐그덕댐'이기에, 그것이 '긍정적 징조'이기에, '그러므로 갈망하는 만큼 네가 되기를' 화자는 바라는 것이다. '너'에 씌운 각질(='(너)')의 시초와 말세 사이에서 꿈틀대는 화자는 영혼의 안식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길은 어느 곳에도 나있는 듯하지만 또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방법의 방정식을 김정란은 어디서 어떻게 찾고 있는가. 어디에도 방식이 없고 찾아도 없다, 김정란은 괴로워진다. 불면의 밤이 닥치면서 그녀는 끔찍하게 자신을 향해 외친다. '이 끔찍한 서른 몇 살의 팅팅 불은 두부'([화장-추함에 길들기.2])인 자기를 바라보고, '밥풀딱지같이 세계라는 밥그릇의 가두리에 붙어 있'는 자신을 발견([지하철에서-추함에 길들기.3])하면서 괴로워한다. '나는 너(=詩:필자 주)의 자신없음'([나의 詩-약한 너에게 기대어])을 지키고 지금 나는 다시 '넝마'([나의 詩-죽음과 더불어])로 전락했다. 이제 탈출구는 거의 없어 보인다. 경악하는 화자.

오 자아. 지옥의 볼륨. 삶.
죽여버려라. 저 끔찍한 괴물.([불면-추함에 길들기.1])

그리고 그녀는 '말씀'을 향해 안으로 외친다. 설 힘조차 없는 나는 현재 '까치발로 간신히 서' 있는 상태다. '그대는(가) 얼마나 황당히/내게서 삶의 물량을 앗'아간 상황이다. 지금 '나는 끝에 민감해'지고 '한 점으로/대롱대롱/여기에/매/달/려/있'다. '바늘. 말씀이여. 내가 뾰족하게/이 一回의 삶을 배반하나이다'. 이러한 절망 상황에서 불현듯, '그 밤 안에서 나는 느닷없이 당신을 만났더니다, 혹은, 그런 듯했더니다//당신은 누구십니까//그리고 나는 대번에 들었더니다//"나는 먹물이니라"'고 읊조리면서 스스로 먹물임을 인정한 화자는 무언가가 더욱 간절해진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먹물'이란 자각과 함께 '구체성의 적의를 상대로' 다시 화자는 이렇게 독백하는 것이다.

하오면 부정형의 예감이여 내게 무엇으로 절망과 마주서라 하시니까
이 끝에 민감한 영혼의 뾰족한
資質로 당신을 푹푹 찍어쓰리이까 오 혼돈이여([나의 詩-무한의 받아쓰기])

한때 '자폐의 형식을 음모'([절망적인 詩法])하던 화자는 갑자기 광주의 오월에 대한 현실적 아픔으로, 방관자로서의 자기를 가책하며 다시 신음한다. 그리고 '작은 아니마'24)를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하는 화자 김정란. 이 작품 [절망적인 시법]은 답답하고 울적한 첫시집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를 드러내고 있다. 비로소 봄을 감싸는 사물들의 '무게'를 버리고 '감기의 꼭대기에서 가볍게 튕겨'오른다. '아모로소amoroso(=애정을 가지고)''내 안의 날개들이' 춤을 춘다, '육체의 춤을.//하느님 아아 이 가벼움을, 나는 울면서 (감격해서) 하느님이라고 불러'([봄]) 본다.... 이제 시인은 미래를 향해 맑은 꿈을 꾼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시인의 권리25)라고 했던가.

내 詩?//날개? 좋아하시네. 하늘? 웃기시네.//
물이다, 비정형, 형태를 거부하는 의미로라면, 글쎄, 조금은.
그, 막무가내의, 목 빼고 있는 형상을 보시라, 불쌍해라.
잠 안 드는 아니마여, 열심히, 하늘을 베끼는 탁한 물이여.
// (...) //
그리고 이 밥그릇, 물과 체적이 뒤엉켜
보다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라고 외워대는
이 난감한 場에서,([나의 詩-여기에서, 언제나 여기에서])

'내 시는 비정형의 물이다.' 그래서 화자는 스스로 '불쌍해라,'라고 끌끌 혀를 찬다. '그, 막무가내의, 목 빼고 있는 형상을 보시라'고 말하며 '작은 아니마'에서 '잠 안 드는 아니마'를 흔들어 깨운다. (이때 화자는 남성이 된다.) 화자의 시는 '잠 안 드는 아니마'. 이때 물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성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성성인 물이자 아니마이기도 하다. '물과 체적'에서 물은 여성성을, 체적은 남성성을 띤다. '보다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진 밥그릇, 이것이 화자 김정란의 '인식의 싸움터'인 시다. 그녀는 그러나 '뜨거운 죽그릇에(도) 연연'하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다가 문득 터뜨린 중요한 말.

체적에 대한 혐오. 상대성에 대한 혐오.
내용과 거기에 가슴 얽어넣기,
구질구질한 연연함에 대한 혐오.//
본질의 가출, 존재의 가출.
나는 빈 집 앞에서 잉잉 운다...하느님...어디 있는 거야.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詩法])

'체적에 대한 혐오. 상대성에 대한 혐오'를 갖는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이 시구는 화자 내부의 남성성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왜 이럴까. 이것은 화자의 아니무스를 축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질과 존재의 가출인데도? 그러니까 앙탈부리다가 '빈 집 앞에서 잉잉' 울 수밖에. 그런데 그녀 시에 힘이 보인다. '나는 내적 확신과 외적 무력함 사이에서 신음했다. 누군가 와서 내 언어를 지옥에서 끌어내어 주기를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래, 솔직하게 고백하자, 힘을 가진 남성의 언어가, <오르페우스Orpheus>가 찾아와 내 시에 월계관을 씌워주기를 기다렸다는 말이다.'26) 이 글은 김정란의 마지막 고백처럼 들린다. 실상 그녀가 원하는 것은 '힘을 가진 남성의 언어'다. 이 말은 적어도 제3시집 출간 후, 그녀의 고백이었다. 첫 시집은 페미니즘에의 자각이 시 속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좀더 단단한 여성주의자가 되는 길이라는 주장이 새롭다.

김정란은 시 쓰기에서 '새로운 전통 방식과 길항(拮抗)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의 <근대성 이론>은 '유토피아에 대해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27)고. 결국 '새 전통'이나 '유토피아 인식'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다. 적어도 첫 시집에서 나타난 새로운 패러다임은 김정란식 아니마/아니무스의 절대적 길항을 파악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김정란식 페미니즘의 단초로 보고 있다. 그녀도 일단 타자를 인정했다, '사랑은 타자에게 매혹되어 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아가 자아를 부수는 사건'28)이라면서, 타자의 진정한 만남이 궁극의 사랑이라면서. ―김정란은 부제인 '[적의로서의 코기토]' '[무덤의 꿈]'에서 맹렬한 유년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실존을 상처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어째서, 내 유년의 자아는 온통 세계 앞에서 싸움꾼으로 자리를 정했던 것일까, 무엇이 삶을, 내게, 선험적으로 불편한, 그 무엇이 되게 만든 것일까.//(...)//나는 자신있게 손톱을, 가지런히, 내 존재의 지평선과 명쾌하게 <같은 각도로, 같은 방향으로> 정렬한다. 그리고 나는 징징대는 자들을 향해 돌진한다. 아니, 오히려 나는, 명쾌한 형식 자체의 덕성에 의하여 내 <앞>으로 튀어나간다. 내가 내가 '아닐' 때, 오 얼마나 나는 나이면서 힘세고 아름다운가.([엄마 버리기, 또는 뒤집기])

화자는 강한(맹렬한) 유년 시절을 지니고 있다. 지독한 싸움꾼으로 유년의 실존을 확인해왔다. 그녀는 '자신있게 손톱을' '정렬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자들을 향해 돌진한다.' 그 모습은 얼마나 '힘세고 아름다운가.' 김정란은 지금도 의식의 내외벽 사이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녀가 중얼거릴 때는 불만이, 불안이 가중될 때이다. 정작 중요한 해답은 다음의 시구에 고스란히 놓여 있음에 모두 긴장하자, '엄마'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일까. 내 안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이 음성은? "그건 엄마야, 그 무덤을 뛰어넘어야 해." 내 몸뚱이는 그 자신있는 목소리의 경쾌함에 실린다. 나는 가볍게 그 무덤을 뛰어넘는다. 가볍게. 나는 전혀 엄마에게 미안하지 않다.(앞시, 부제 <무덤의 꿈-엄마 뛰어넘기>)

그런데 처음부터였을까, 이 무수한 타자들의 동반은?(...)//(..)//
웅성거리며, 절대로 일정한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지독하게 나는 그들과 더불어 인식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갔다...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해...
우리는 서로 꼭 껴안았다. 우리는 서로의 안으로 삼투해 들어갔다.(앞시, <집짓기-나 혼자 살기, 바깥에서>)

엄마의 무덤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거꾸로 마음 속 아니무스를 위한 불필요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무덤을 뛰어넘는 행위 역시 모성성(또는 여성성)에 대한 기대치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동반하는 '무수한 타자들'이 '일정한 거리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가 절실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안으로 삼투해 들어'가면서 화해한다, 타자와 모처럼의 진정한 화해를.

지금까지 김정란식 화해의 악수법을 지나쳐오기가 매우 힘들었다. 결국 첫시집의 마지막은 새로운 여성성을 인식하고 만나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외적 투쟁이 서서히 갈등을 앓는 중에 어느새 계속된 <중얼거림>은 <속삭임>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서 <중얼거림/속삭임>을 비교해보자. 전자는 대상이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방백/독백이다. 이를 남성성으로 인식하자. 대개 우울하며 마치 넋 잃은 모습이다. 후자는 분명한 '대상'이 있으며 비교적 여성성을 지닌다. 사랑의 언어가 고운 목소릴 통해 그대에게 흘러갈 것이다.


- 평문 몇 가지

김정란 시의 본격적인 평문으로 김현의 시집 해설이 돋보인다. [딱딱함과 가벼움-김정란, 혹은 삶이라는 질병의 구조]에서 김현은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29) '그녀의 시를 즐기는 첫번째 요체는 그녀의 외관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 주위를 환기시킨다. 실제로 김정란은 언어를 현란하게 끌어나간다. 어쩌면 그녀가 프랑스 특유의 <에쎄 비평>같은 가벼운 글에 익숙한, 방법론상의 재치를 선용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 김정란 시의 질료는 끝없는 스토이시즘이다. 그렇다, 어차피 시의 본질.내용 파악이 주목적이라면 우리가 굳이 시인의 지적 농간에 어리석게 휘말릴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그녀 시에 대한 난해성 인식은 시의 외형과 그녀 나름의 위장된 중얼거림에 우리가 집착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혼미해진 것이다. 김현은 한 마디로 '불유쾌함', '아니, 차라리 질병학적인 것'으로 못박으며 이것이 곧 '함정'이라고 일짚는다. 이미지 차용 문제도 단순하다면서 '긍정적/부정적 이미지의 대립'이 그녀의 상투수법 같다는 의문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대어들이 서로 뒤엉켜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박혜경은 두 권의 저작물에서 모두 김정란을 비중있게 다룬다. 첫 비평집의 [자폐...]에서는 김정란의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문지, 1989) 속 작품을 분석했다. 박혜경은 [자폐...]에서 김정란 시를 '자폐'라는 말로 대신하고, 다음과 같은 핵심으로 김정란 시에 반감을 표시30)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장소에 대한, 예를 들면 헛되고 탈색된 모습의 이곳과 실체로 풍부한 다른 곳-그녀의 시는 언어를 가능한 한 억제하려는 쪽이 아니라, 언어의 방임, 혹은 언어의 자유로운 가속적 흐름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는(...)자기 폐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김정란의 시가 대체로 어렵게 읽히는 것은, 그녀의 시가 공적인 삶의 토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극히 사적인 의식 내부의 전후 문맥 속에 갇혀 있음으로써, 우리의 추측이나 체계적인 해석에의 욕망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거의 열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91)

그렇다, 이 견해는 사실에 거의 근접한다. 박혜경 뿐만 아니라, 김정란 시를 읽는 이들 다수 인식의 공통 분모이기도 하다. 이것이 김정란 시의 문제점이다.

[소통...]은 김정란의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1989)와 두번째 시집 {매혹, 혹은 겹침}(1992)을 다루었다. 박혜경은 이곳에서도 '시란 소통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고는, 우리를 '딜레마적 상황'에 빠지게 한다면서 '불편함'을 전제하고 있다.31) 그녀는 여전히 '다분히 작위적인 소통 장애의 형태'32)를 취한다는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 '불편함'에 대해 김정란은 노골적으로 자기 시의 '다름'에 대해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또 '늘 익숙하고 편안한 것만 찾으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문학은 현실에 길들어 있는 <노예의 정신>을 깨우는 연장'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해가 쉽지 않다.

요컨대, '불편'을 감수할 때에만 인간은 다른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문학은 애매한 감상주의로 추악한 현실을 적당히 가리고 숨기는 기만적 정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비밀을 캐내는 힘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든요.33)

이를 보면 김정란은 자기 시의 난해성을 일단 인정하고 있다. 아니, 일반적인 시와 자기 시의 '다름'과 '불편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박혜경의 이러한 지적이 김현의 주장과 다르지 않고 엇비슷하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중요한 것은 김정란의 '시가 지닌 이해와 소통의 어려움이 다분히 전략적이고 작위적인 것'이라는 그녀의 지적이다. 무엇이 작위인가. '작위적'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설명은 없지만, 정확·의미있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한 트릭이라도 문제는 문제다. 시의 구성상 '전략 설정'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작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무엇을 노리는가. 문학이 퍼즐일 순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에 한시적(限時的)이지만 거짓을 섞는다? 그리고 독자에게 맹목적으로 이해 및 감상을 요구한다? 맹목적인 횡포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우리(독자)가 시인의 트릭까지 친절히 읽어야 한다면, 문학 생산자로서의 '우리(시인)'는 차라리 시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음 글을 보자.

좀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해체의 이론을 시적인 언어로 재구성해낸 것, (...) 그리하여 '그만큼 재빨리 지배 언어에 편입될 염려를 이 시들이 안고 있다'는 황현산의 우려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려는 그녀의 시들이 보여주는 언어적 해체가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시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점, 즉 그녀의 해체 전략을 이끌어가는 힘이 현실의 구체성이 아닌, 이론적 추상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란의 관념적 해체 언어들은 현실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기도 전에, 일종의 언어적 장식으로 떨어져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219)

여기서 '해체의 이론을 시적인 언어로 재구성'했기에, '그만큼 재빨리 지배 언어에 편입될 염려를 이 시들이 안고 있다'는 황현산의 지적은 일견 수용할 만하다. 그러나 <詩感>34)이 없는, 아무래도 내겐 보다 의미롭지 못한 '들림'으로 다가온다. 시가 시로서 구실 해야지, 시론이나 기호로 존재한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다. 김정란 시에 미의식(美意識)이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 앞에 표정이 경색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생각하는) 시의 전도가 막막하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왜 없겠는가.)


- 글을 접으며

김정란은 다분히 서구적이다, 프랑스적이다. 김정란은 그 사유의 체계 코드부터 우리 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나의 이 요구는 정당치 않지만, 그래도 실낱이나마 유효하기를 희망한다. 그녀가 너무 한국적이지 않고 프랑스적(쇼비니즘의 의미는 없다)인 것이 문제다. 외래 지향의 낯섬, 이것은 참신성이나 기똥참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우리가 시의 몰이해를 원망치 말고 우선 자기 자신부터, 자기 작품부터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왜 서구적인가, 바보같은 질문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묻는다. 우리의 친근한 인지도(認知度) 곁으로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싶지 않은지.

하지만, 거꾸로 '도대체 김정란 시의 어느 곳이 구체적으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경향이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입증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을 파고들기 전에 시의 전개 형식에 눈을 뜨면 자연스레 시의 비밀이 열린다. 코기토Cogito…, 인간의 존재 이유는 사고하는 데 있다? 데카르트식 사고에서 진일보한 사유 방식으로, 김정란은 푸코를 동원하여 우리에게 계속 '속삭'인다. 처음 살펴본 것은 <중얼거림>이었다, 낯설었고 어색했다. 대개 일반적 경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글이 뭉크의 그림 속 [절규]로 다가오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폭력적 페미니즘?

거듭 말하거니와, 정작 크나큰 문제는 김정란의 시작법에 있다. 그녀의 시는 단어와 어휘를 풀어야만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시작법상 초보 단계에 불과한 문제점이다. 의아하게도 그녀는 시 쓰기의 주안점으로 '한 단어에 의미 심기'를 시도하는 것 같다. 우리(독자)에게 식단을 제공하고, 그 중에서 한 그릇의 음식만 들기를 강요하는 듯하다. 엄연히 문자를 역이용한 질 낮은 횡포다. 극히 사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중얼거림>으로 들려주는 데(방식)에 의혹이 간다. 이 글에서는 그녀의 푸코식 중얼거림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낱말(단어) 몇 개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기 작품(또는 자기의 고통) 이해를 우리가 인지해주길 요구해서는 안 된다.

돌이켜 보건대 아무래도 그녀가 한때 기울었던 본느프와 시에 대한 혐의와 그 낌새를 떨칠 수가 없다. 이건수가 소개한―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본느프와의 {시집Poems}35)―시집은, 우선 고유명사인 '두브Douve'란 제목에서부터 난해해 보인다. '두브'란 성벽 주변에 파놓은 도랑이란 설명부터 낯설기만 하다.

저 멀리 돌 틈에서 그대 이름은 두브가 되리.
깊고도 검은 두브,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얕아도 줄어들지 않는 물

그만 어려워서, 몰이해의 벽에 부딪치고 만다. 이건수가 본느프와에게 '다짜고짜로 두브의 정체(정의)에 대해 물어 보'니 '시의 기능인 다의성polyemie을 고려한다면 두브는 시편들을 통해 변화되어가는 유동적인 현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까운 이의 존재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개방된 총체성totaliteouverte으로서의 언어'36)로 풀이해준다. 그리고 스스로 독백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감이 있는 두브의 의미 부여의 단서는 역시 그 운동성mouvement과 부동성immobilit 의 대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빈 형식으로 의미의 바다에서 표류하다 특정한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고정되는 것―두브.

여기서 더 이상 본느프와의 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김정란 시의 비밀은 본느프와의 자유분방한 시적 방법의 유사성에서 그 표현상의 동일감을 이고 있다. 이러한 김정란의 시는 형식면에서 <속삭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중얼거림>이 더 분명하다. 시는 언어의 조직인 만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본질적으로 함의하게 마련이다. 중얼거림이든 속삭임이든 저들의 언어 소통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대의 기호들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뭇거렸고,
이런 나를 치밀한 밀도로 추격했지 그대는.37)

김정란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김정란에게 이 시를 되돌려 준다. 우리가 그녀의 시를 시니피에로 읽으려고 노력한 점에 비해, 그녀의 시가 거의 시니피앙의 기호적 차원에 머물렀다면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호는 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김정란이 첫시집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시의 배치(차례)에 신경 썼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고통스러운 과정이 '고통의 몸부림'을 통해 어떻게 여과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여늬 시인처럼 그녀도 구원 받기를 적극 갈구하고 있다. 어떻게? 바로 아니마적 존재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페미니즘 시각이다. 그녀의 절규가 몸부림으로 수십차례 나타남이 확인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정란의 시는 페미니즘 실상이 많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얻었다. 짜증날 정도로 중얼거리는 화자의 몸부림이나 경악의 정황을 찾아가다가 파악한 것은, 사실 보편적 삶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상사였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의 지난한 몸짓은 거짓이고 허세란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는 기존의 질서에 대해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온몸으로 싸우길 자청하고 또 격렬히 대처·방어하는 중이다. 지나친 관념어 사용이 너무 눈에 거슬리지만, 그 점은 페미니스트들의 극단적 언어 생체험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 싸움이야 늘 생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김정란은 고통의 축제로부터의 일탈을 내심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했다. 바로 (원초적인) 어머니상이다. 어쩌면 이 대단한 모성성이 김정란에게 구원 의식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것도 과격한 남성 언어로 말이다. (페미니스트로서의 김정란의 모습이 제2, 제3시집에서 극단을 지향하는 것을 보라.)

남성 언어는 그러나 배격의 차원에서 등장시킨 게 아니다. 김정란이 원하는 대남성성은 타자와의 동행(또는 포용)이다. 그러는 중에 화해(和解)가 있었다. 그러니까 김정란은 시의 저 깊숙한 늪의 바닥에 페미니즘을 깔아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평소에 여러 글을 통하여 자기 시의 몰이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러 모로 표현한 바 있다. 문제는 그녀의 시구가, 단어가 지극히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야기(惹起)시킨다. 더 이상 우리는 언어의 극단적 폭력을 좌시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김정란도 그 폭력어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말해서 그녀의 시가 짧아져야 한다. 시는 이미지라는 그릇을 (아직은) 작품성과 결부시켜 격리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견해다.

서두에서 필자는 프랑스식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다소 성급한 감이 든다. 그러나 첫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는 페미니즘의 단초를 기본적으로 생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텍스트다. 남성성 언어와 그 사회 구조, 그리고 남성 중심 사고의 내벽을-크리스테바처럼-부수고자 하는 단단한 의지야말로 김정란 시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때로는 말더듬이로, 비문(非文)으로, 언어 소통을 일부러 훼방하는 화자의 '미필적 고의'를, 언제까지고 짐짓 우리가 모른 척 외면할 순 없다. 김정란 시의 이해는 그 고통의 원초를 찾아가야 한다. 그녀는 매우 정치(定置)하게 시의 언어를 배치하곤 우리를 은근히, 근근히 유혹한다. 자신의 내적 아픔을 함께 나누기를 강요한다. 그렇겠지, 자신이 너무 고통스러웠으므로―. 문제는 그녀의 고통의 실체의 감(感)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픈가? 나는 할 말이 없다. 실제로는 아주 맹목적인 경우가 있다. 그녀가 자신의 아니마를 찾기까지는 어떤 숱한 인고와 절제와 체읍이 있었을까. 그녀로부터 그 고갱이를 듣고 싶다.

...그곳엔 <중얼거림>이 있었다, <속삭임>이 있었다(있었을까?). 그 사이에 시인의 실존이 있었을 것이다. 깨달음이 있었다(있었을까?). 마치 합리적 이성론자인 데카르트의 21세기판 '코기토 에르고 숨'이란 집요한 김정란 식 외침이라고 일단 나는 인정키로 한다.

지금까지 <김정란의 페미니즘 경향>을 세밀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출발한 페미니즘식(式) 중얼거림(?)을, 다른 시집들을 통해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속삭임(!) 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란은 이제부터 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그녀가 요즘 문화의 과격한 게릴라가 되어가는 모습에, 나는 실제로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소견이지만, 나는 그녀가 끝까지 문화인이 아닌 문학인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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