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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신춘문예..
부산인터넷뉴스
2007. 4. 14. 02:24
2004년 신춘문예 심사 書評모음 /교안 준비 강봉환 교수 | |
![]() <<2004년의 일간 신문 신춘문예당선 시 읽기>> [경향신문] --응모시에 대한 견해 (예*)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다. 요즘 시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에 작동하는 유질동상(類質同像)은 본디 ‘혼돈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명석한 것’이라는 시의 초기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예*)너무 많이 동원된 은유나 생경한 환유가 시적 소통의 회로를 막아버린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이 모든 게 기실은 할말도 딱히 없는데 억지로 시를 쓰고자 하는, 혹은 시 쓴다는 착각을 즐기고 있는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향후 한국시의 불길한 경고음으로 들려왔다.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이 작품이 앞서 말한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비교의 차원에서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응모시에 대한 견해 (예*)소외된 삶의 애환을 능숙한 솜씨로 공들여 시화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어딘지 모르게 낡았다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예*)직조된 시상이 다소 작위적이어서 시의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문화일보]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세계일보]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조선일보]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킨다. [한국일보]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 1. 신춘문예 당선시에 대한 심사의견의 흐름 위의 발췌된 내용과 같은 각 신문사의 당선 시에 대한 시적 심사내용을 보면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심사위원들의 시적견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우리는 읽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5년간에 걸쳐 나는 이러한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시를 읽으면서 가지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시를 그러한 형태로 써 왔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물론 시인은 자기 자신의 언어로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이미지를 시적정서로 승화시켜 시를 써야 하는 것이며, 새로운 자신의 내적 실험에도 도전을 하여야 한다는 데까지 양보를 한다해도 어째서 그들은 지난 십수년동안 그들이 취하는 형식의 전형을 답습하여 오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속에서도 시적 혼돈의 상황을 경험하는 실험적인 시도도 있었고, 난해한 이미지의 실험이나, 언어의 목조르기와 같은 이미지 비틀기의 형식을 빌어 쓰는 글만이 신춘문예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완전히 별개의 시쓰기 습작을 하여야만 되는 것처럼, 신춘문예를 인식하는 기이한 문학적 풍토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십수년간 심사위원들의 면면은 그리 바뀌지도 않은 채 어찌보면 장기집권과도 같은 단골 심사로 굳어온 저간의 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너무 의심이 많은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사유로 인하여 우리 한국시는 지난 세기 말의 십여년 동안 시적 혼돈을 경험하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세력과 그것을 뒷짐지고 관망하던 현실회피주의자들의 염려만으로 점철된 시적 현실을 경험하였던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때, 내적 정합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융합이 마치 대단한 시적 실험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춘문예 작품들이 난해함 일색이 되던 시절도 있었고, 심사위원들만 그 의미를 간파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기성 시인들조차 그런 시들을 읽고 그 의미를 간파해 내지 못하여 고생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작년, 2003년부터 그러한 성향의 시들은 점차 자리를 내어주고 본디 시가 가려는 시적 진정성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미지의 정합성이 추구되는 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우리 한국시의 새로운 모습의 탐색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고무적인 변화라 말하고 싶습니다. 경향신문 심사평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라는 지적은 시가 가져야 하는 중심이미지의 훼손이나 혼돈을 경계하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나간 몇 년 동안 신춘문예 시를 풍미하던 시적 경향의 하나인 “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이 시를 혼돈에 빠뜨리게 하기 쉽다는 것은 지난 날에 시적 실험이라는 명분으로 미화되던 과거의 시적 경향으로 파생된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또한 “너무 많이 동원된 은유나 생경한 환유가 시적 소통의 회로를 막아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지적도 과거의 유산에서 파생된 경향의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사회적 관심이 정치적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의 얽힘 속에서 누구의 잘못인가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없이 모두가 남의 탓이 되어 버리는 사회 비판적 태도가 새로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라는 지적은 자유로운 시적 상상력을 묶어온 윤리적 가치나 당위성 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흑백논리에 길들여진 시인 자신이 그 함정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 탓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를 위해서 시인은 시를 읽어주는 일반적인 대중 보다는 훨씬 더 깊은 철학적 고뇌를 하여야 하고, 현실 사회에 대한 뒷모습이나 그 내면에 감추어진 현실에도 균형감 있는 시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경도되어, 그 길만이 민족을 살리는 길처럼 이 나라를 살리는 길처럼 독점적인 폭거를 풀어놓아 다른 의견은 처음부터 발을 붙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온 점은 없었는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매우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다양한 의견들이 이 사회를 좀 더 폭넓게 발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세계도 넓혀 나가게 되는 토양을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신춘문예 당선 시 감상 금년에 당선된 신춘문예 당선詩의 대부분은 과거의 양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당선작품들이 산문시 계열 중심이었던 데에 비하여 이번에는 형식상으로는 산문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금년도의 당선작품들이 산문시적 요소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 산문시라고 해서 시가 나쁘게 평가되어서도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시 형식이 산문적 형식에서는 멀리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근자에 들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시 형식이 산문적이냐 운문적이냐에 대한 문제 보다는 오히려 종전에 시적 요소로서 중시해 왔던 운율이나 음보의 시적 운韻에서 벗어나 내재율에 더 치중하게 되는 형식이 폭넓게 퍼져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시는 과거의 시적 운율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하고, 오히려 단편소설이나 수필은 시적요소를 가미한 다양한 표현기교로 시의 영역에 바짝 다가와 그 경계면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칫 어느 시기쯤 가면 시와 소설이나 수필의 영역이 모호한 시기가 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염려까지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적절한 비교가 될 지 모르겠으나, 과거 유행가들이 음과 박자에 충실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땐가 부터 반박자 쯤 쉬는 엇박자의 리듬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박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랩이나 중얼거림이 음악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현대의 흐름과 시적 변화의 흐름이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시에서 간결하며 감추면서 드러냄의 극치라고 할만한 압축이 최상의 기법이었던 것처럼 여겨지던 시의 전형에서 이제는 그 틀을 벗어던지고 보다 더 쉽고도 멋이 중심이 되는 표현기교의 시대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실 시적 정서가 다양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알맹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 그저 울림만이 큰 시가 더 많이 발견되고, 또 그러한 시들이 표현기교 면에서 더 많은 시적 분위기를 드러내 주고 있다는 이유로 신춘문예 작품이 표현중심의 시에 더 많은 비중이 주어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선된 모든 시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는 앞 뒤에 한두개의 단어만 보충하면 그것은 “시”라기 보다 오히려 “수필”이라고 해야 할만한 글이 행가름으로 유지되는 내재율에 의해 시로 생각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만한 시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가 어쩌면 수필의 경계면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나의 그런 의견에 단호히 아니라고 반박하고 나설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신춘문예제도가 이 시대에 한국시가 나아가는 방향타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시의 경향을 가볍게 지나쳐 버려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쓸데없는(?) 염려는 이제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징후에서 우리가 보다 더 바람직한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고 과거의 장점과 현대의 장점을 접목하여 훨씬 더 아름답고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시의 지평을 열어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시인들의 책무이기도 하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경향신문에서는 서민의 삶 속에서 그려지는 눅눅한 삶의 평범함을 통하여 단조롭고 권태로운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동화적인 낭만이나 희망을 노래하여 그 끈을 놓지 않는 기교가 엿보이고 있으며, 동아일보의 당선작품에서는 서민들이나 빈곤층의 삶을 바탕으로 계층간의 단절과 냉혹함을 드러내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의 현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문화일보의 당선 시에서는 매우 다양한 환유와 울림이 큰 역동적인 시어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나 그 동원된 어휘나 역동성에 비해 시가 주고 있는 정서적 감동의 크기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 단점도 보이는 것 같고, 보이는 것들의 움직임이나 가벼운 정서를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고 적절한 비유로 환치시키고 있는 점이 좀 더 특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대칭적 기교로 시를 쓰는 것이 좋은시라는 것이 등식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의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다루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자유분방하게 그만큼 새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하겠지만, 그 크기에 비하면 시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그리 큰 것은 아니라는 약점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의 죽음을 앞에 놓고 그 영안실에 지나치는 여러가지 상념을 차분하게 정리하여 아픔을 그려낸 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산문적 경계면에 너무 가까이 다가선 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폐타이어”는 비교적 빼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적 삶 속에서 잊고있었거나, 반성 한번 없이 살아왔던 사상들을 문명적 삶이 끝난 타이어를 통해 문명이 멈춤으로서 얻어지는 새로운 자유 속에서 만나는 소박한 정서를 끌어내어 재해석하는 기교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일보의 당선시는 지나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유물을 통해 시대적 공간적 삶을 건너 현대의 삶에 투영되는 모습을 잘 정리해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에서 대강의 시들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의 시가 얼마나 잘된 작품인가에 대한 해설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한국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시를 쓰며 고뇌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현대와 과거의 교량적 역할을 하여 그 아름다움이나 탁월한 표현기교를 통해서 더욱 탄탄하고 멋진 맛이 깊이 우러나는 시를 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핵심이었음을 이해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3. 새로운 시적 변화에 대한 흐름의 정착과정 문학의 최초의 형태는 모두 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주술적 주문에서 짧은 형태의 간결한 정형시, 자유시로 발전하고, 서사시에서 소설이나 희곡으로 발전한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본다면 시가 산문적인 요소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자의 표기법이나, 문법의 형태적 차이때문도 있겠지만, 서양의 시가 대체로 서사적 구조를 가진 시가 많고, 산문적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최근의 영시에서도 여전히 산문적 표현이 두드러진 시가 아직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다르지만 한국시가 일제 이후 서구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우리 시의 모습이 상당한 현대화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은 대부분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제까지 우리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만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이나 내용은 여러 번 울궈 먹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 사골처럼 굵은 뼈가 중심이 되는 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춘문예에 나타나는 시는 뼈가 많지 않고 울궈먹을 필요가 없는 다양한 맛이 나는 산뜻하고 깔끔한 생선과도 같은 살이 중심이 되는 시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어느 것이 우월하고 좋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지배해 오던 그 깊은 맛을 중시하던 경향에서 찾을 수 있는 장점과 이제 새로이 나타나는 장점을 잘 조화시켜 더욱 아름답고 멋진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나치게 표현기교에 매달려 깊은 맛을 잃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고, 너무 과거의 전통적 향수에 젖어 다양한 맛을 내는 여러가지 정서를 조화시키는 언어적 표현 기술을 도외시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춘문예 작품들이 나타내 주는 여러가지 형식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하여 자신의 목소리에 맞는 새로운 시적 정서를 만들어내고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색깔을 입혀나가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003년을 기점으로 변화의 흐름이 속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2004년에는 더욱 시적정서의 정합성이 있는 작품으로 나타나고 있는 증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속에 흐르는 중심 정서에 맞는 합리적인 정서의 상징이나 비유가 시를 더욱 고결하게 만든다는 평소의 주장은 이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아 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라는 지적은 시가 가져야 하는 중심이미지의 훼손이나 혼돈을 경계하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며, 1990년대에 풍미하던 여러가지 애매한 상징의 도입이나 엄청난 비약으로 시 속에서 제대로 소화되지 않는 난해함을 하나의 시적 기교로 생각하여 혼돈을 자초하던 시적 실험에 대한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시가 가고 있는 길에 산문적 경향에 대하여는 좀 더 깊은 고뇌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도 성급한 판단이 될지도 모르며, 여러가지 다양한 실험적인 형식의 돌출과 중심정서의 표현이 새롭게 나타나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흐름을 무시하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충분히 소화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육화시킨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