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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왜소성을..

부산인터넷뉴스 2007. 4. 14. 02:37
[【교안강봉환교수】] 현대시의 왜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인의 자세


<<현대시의 왜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인의 자세>>

문학비평가들은 현대의 시인들이 작은 일상성에 매몰되어 개인적인 하찮은 사소한 일상적 체험이나 관점에만 눈을 돌려 시가 왜소해지고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매우 근시안적인 형상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근저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과거의 거창한 시대적 이슈(issue)—군부독재에 대한 항거라든가 비 민주적인 행태나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노동자들의 곤궁함을 주로 다루는 문학적 테제(These)—가 거의 해소되고 오히려 그러한 과거의 현상적 운동에 대한 반작용이 더 문화적 병폐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문화를 향수하는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새로운 공감의 “화두”話頭가 적어지고 있다는 데에 더 큰 요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눈을 돌려 보면 사회적 이슈(issue)가 될 수 있는 농촌 문제라든가 노인의 문제, 가족해체현상, 교통문제,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 문제, 환경문제, 아직도 자리잡지 못한 부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 oblige), 취업과 관련한 실업문제, 여성문제, 독도문제, 남북한 통일에 대한 감상적 문제 등등의 문제들이 산재하여 있지만 그러한 문제가 사회 전체를 압도할만한 과거 독재시대의 저항정신과 같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어떠한 문제들은 시인 각자의 생각에 따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어서 사회적 공감을 사회전반에 확산시키기 어려워진 문화적 시대적 특성을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획일주의는 오히려 문학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각각 자신의 생활 체험 속에서 많든 적든 그러한 문제 의식과 맞닥뜨리는 일이 있을 때나 그러한 소재에 의식을 두고 시를 쓰는 단편적인 활동에 머무르게 되어 마치 모든 시인들이 온갖 시대현상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적게든 많게든 직간접적으로 그러한 시대의식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이 모두가 시대의식에만 매달려 글을 쓰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시인 각자가 그러한 시대적 현상에 개별적인 접근을 하며 자신의 철학이나 정서적 발원에 접목을 시키는 일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시인들이 고민하고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한 탐구의 과제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의식들을 어떠한 시의 그릇에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형태로 표현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뇌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시인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의 표현 형식이나 정서적 밀착 형식에 대하여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는 시가 어떤 형식의, 어떤 형태의 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확고한 문학적 중심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며 그러한 실험적 정신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자신의 시적 영역을 구축하는 일이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시읽기 과제로 선택한 시의 대부분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글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경험 축에서 진행되는 각 시인들의 의식의 단면들이 표출되고 있는 시들로서 과거 선배들의 시 쓰기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시대적 모순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그러한 시대적 모순을 자신의 철학적 배경 속에 은밀하게 농축시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왜소성의 문제에 실질적인 대안도 없이 비난을 하는 일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의 생활방식이 인터넷의 발전으로 정보의 교류나 확산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주의에 몰입되어 정보가 편중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시대이므로 시인들만 학처럼 고고하게 고집을 부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시인들은 적어도 자신의 철학이나 가치관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쳐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시대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깨달음에 진솔하게 접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이 시대를 살면서 이 시대적 아픔이나 고통을 노래하고 치유하는 선각자로 앞장서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을 되돌아 보면 자신이 무슨 대단한 성인聖人도 아닌데 어찌 그런 건방짐을 가질 수 있느냐고 겸손을 떨만도 하지만, 자유로운 개체로서의 시인은 자신의 사상과 정서를 자신의 시각과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겠지만, 이 시대의 시인들도 시를 쓰면서 그 시 속에 담고자 하는 사상과 정서에 어떤 시적 상관물이나 상징성을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고뇌하는 시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시적 이미지에 그때 그때 선택된 사상이나 정서를 적당히 버무려 넣는 일로 시인의 책무가 끝난—시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인들의 사고가 시적 감흥을 느끼는 것 만으로 시를 쓰는 동기로 끝나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의 시적 정서나 철학을 담기 위해 어떤 사물이나 정서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그것들을 어떻게 버무려서 하나의 정감 넘치는 시로 완성시킬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고뇌의 과정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한 하나의 좋은 연습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신만의 정서에 외부적 요인들을 용해시켜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에 선명한 화인火印으로 남을 만한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이 시대에 시인들이 가져야 할 시대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050226)


(*) nobless oblige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든 크든 일종의 선민 의식 내지는 특권 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 좋은 일에는 자신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은 어떤 특별한 이유 같은 것 때문에 자신이 제외되기를 바란다.
대낮에 멀쩡한 정신 상태로 길을 건너다가 10번 이상 연거푸 교통 사고를 당하는 확률보다 더 희박한 확률인 줄 알면서도, 당첨되기를 바라며 로또 복권을 사는 것도 그런 것 같고, 어떤 예방 주사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독감이 유행할 때, 자신은 예외이길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이며, 치과 치료를 할 때, 발치후의 통증에 대해 자신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등, 언제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선택된 소수'이길 바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선민 의식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민족이 '유태인'들이다. 그들의 선민 의식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거꾸로 나찌의 유태인 대학살의 대상이 될 정도가 되었다. 민족이 아닌 다른 집단으로 보면, 유대교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독교를 믿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도 그에 못지 않은 것 같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뻔뻔스러운 표어를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따져 볼 것도 없는 것 같고, 주기적으로 모여서 자신들이 특별한 대상이라는 것을 세뇌받았으므로 자신은 하나의 선민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폐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라고 해서, 가진 자 내지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서 말들을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소양에 대해서도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 같다. 아니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의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신앙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모범을 보이고 '선택된 소수'처럼 참된 '봉사'를 실천하는 것이 그네들이 그토록 외치고 갈망하는 선교 활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