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강봉환교수】] 김춘수 시인의 시 다시 훔쳐보기 | |
![]() - 북어대가리 김춘수 작은 키로 서있는 김춘수는 북어같다. 머리도 닮았고 다리께도 닮았다. 그의 모습은 아슬아슬해서 그야말로 ‘빗사이로 막 가’다. 완전한 젓가락 모양으로 서있음, 이것이다. 다리 사이로 바람이 들이닥치면 쓰러질 것 같은 아슬한 몸매의 양 다리로 버티고 선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속 안에 윤기나는 매끈한 몸매를 지녔기 때문이다. 윤기가 반질거리는 것은 몸매를 적셔주는 그 무엇이 있음을 입증한다. 빵모자는 아슬아슬, 머리에 빈 바람을 걸러내며 걸려 있다, 아니 걸쳐 있다. 눈빛도 이젠 많이 늙었다. 1922년 출생, 현재 만 78세 플러스. 그의 옆에 있으면 그런데 마른 생태 냄새가 난다…. 김춘수는 생태(生太)다. 생태 이전에 명태가 있었다, 명태 이전에 북어가 있었다. 우린 비릿 마른 북어대가릴 뜯다가 황해를 통째로 마셨고, 그도 모자라면 열흘 안 감은 머리같은 부석부석한 노가릴 한 쾌씩 쭉쭉 뜯어서 씹었다. 흠흠, 이 냄새. 쐬주다! 이랬다. 아아, 나의 20대는 그랬다, 양명문의 <명태>가 곁에서 조용히 맴돌았다. 희은이의 <내 님의 사랑은>과 킹 크림슨의 <에피타프>가 있었고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 있었고 있었다…. 간혹 우리는 사이사이, 있는 폼 재느라고 라흐마니노프를 초빙하고 어쩌다 말러와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김추자의 ‘나를 울려주는 <봄비>’도 눈물도 거짓말도 쪼다같은 문학도 도원동 33번지 판잣집도 자살한 불어과(佛語科)의 대혁이도 <커피코너>도 있었고 있었으므로, 나중엔 검은 바다가 내 곁에서 오좀을 징징 싸며 툴툴거렸다! 나도 징하게 바다 내음을 맡고 보고 자랐다. 김춘수가 제주나 충무에서 ‘은지화’의 화가 이중섭을 보았을까. 바다는 늘 푸르게 자기 머릴 감곤 했다, 내게 머릴 앵기며 보듬어주길 원했다, 나는 줄곧 애무했다. 또 오징어다릴 찔떡거리듯 바다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나는 서가에 구부정히 꽂힌 김춘수를 만난다. 춘수는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어슬렁슬금 다가왔다. 내가 다가가기 이전이었다. <꽃> 이전에 훨씬 이전부터 춘수는 <인동잎>과 <서풍부>를 가지고 나에게 선연(鮮姸)히 추근댄 것이다.1) 황홀해라.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니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넣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서풍부> 전문) - 김춘수의 생태시학 김춘수의 <생태시>를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명확히 제시할 것은 자연이 인간을 향한 애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이는 연민 어린 인간들이 애써 자초한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김춘수의 <처용단장> 연작(連作)을 통해 그의 신생태주의2)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평소 나는 생태시의 특성이 무르녹은 시인의 예로, 미당 서정주의 <신화적 생태시>3)를 조심스레 점친다. 또 미당시 일부를 포함한 김춘수 시의 전반부야말로 역사와 자연 환경과 인정과 삶이 얼버무려진 건데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렴, 이제부터는 모두가 녹색(시)운동을 벌여 빛과 공기의 제 빛깔을 찾아주어야 한다. 인간종에 대한 온전한 연구와 생태환경적 녹색운동만이 인류를 영원히 존속시킬 것이다. 녹색을 사랑하자. 녹색의 뼈를 빨고 핥으며 요리조리 뜯어서 발라먹자. 녹색은 밥이다. - <처용단장>의 식물학적 상상력 앞에서 제시한 내용을 종합할 때 나는 무의미시(Nonsence Poetry)의 시인 김춘수가 전형적 생태주의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특히 <처용단장> 연작시는 생태시 텍스트의 핵심이다. 나는 이 연작이 가장 김춘수다움을 간직한 작품으로 여긴다. ‘가장 김춘수다움’이란, 좀 성급한 결론이지만 그가 생태적 성향에 가까운 시인이라는 뜻이다. 김춘수는 젊은 시절, 모든 사물들과 내통(內通)하고자 노력했다. 내통은 비밀 유지를 뿌리로 삼는다. 사물과 내통/간통을 하면서도 자타가 ‘생명성’이란 용어로 그 자신을 포장해왔다. 하지만 유무형의 비대상과 속삭이는 은밀한 내통은 내게 항시 기묘/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역사 허무주의? 색다른 언어감? 새로운 취향의 생명성? 무의식적 언어세계의 피안 찾기? 이런 징후는 이미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 익히 나타나 있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전문) 샤갈은 눈을 연상시킨다. 샤갈의 마을은 나에겐 내내 겨울이다. 그 샤갈의 마을이 3월을 맞는다. 작품 속 화자인 사내는 젊다. 그런데 ‘샤갈’ 하고 입술로 소리내면, 작고 동그란 동화마을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샤갈~’ 하면 숱한 부호들이, 예를 들어 ‘♬Ф�?∂∽¤!∴∬{}♪’들이, 또는 ‘vow, wow' 소릴 내며 영롱한 비눗방울을 뱉으며 뒤섞인 채 가만가만 내릴 것만 같다…. 사내의 관자놀이는 이미 봄을 맞아 불뚝거린다. 새로 돋은 정맥은 정말로 푸르다. 그것들이 곧 바르르 바르르 떤다. 그의 혈맥은 곧 강하게 역동(逆動)친다, 힘이다. 정맥은 발원(發願)의 이미지를 지니는데, 이윽고 사내의 ‘관자놀이에/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지붕과 굴뚝을 덮’어 버린다. 이때 따스한 눈은 천사거나 하늘의 은총이라도 괜찮다. 동맥피보담은 정맥피가 더 맑고 활달하게 굽이친다. 드디어 산수유같은(?)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밤에 아낙들은/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아궁이에 지핀다.’ 햇햇, ‘쥐똥’이란 비유어가 우습다. 열매 살이 한껏 쪼그라들었다는 뜻일 게다. 물푸레나무과(科)의 올리브빛이라? 타원형 올리브 열매는 녹색보다는 짙푸름에 속한다. 그렇다면 쥐똥 같은 열매에도 봄이 온 것일까, 이미 온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시구는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라는 식물학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단순한 생명주의와는 다르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사물과 내통하는 김춘수의 정밀한 눈이 있다. 한번 더 중요한 곳을 파고 들어가 보자. ‘3월에 눈이 오면/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밤에 아낙들은/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아궁이에 지핀다’는 시구는 심상치 않은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물이 들고’는 젖음 이미지를 갖는다. 밤에 아낙들이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불’을 지핀다고? (애고, 곰살맞아라!) 불을 ‘때다’와 ‘지피다’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진행형이지만 후자는 불을 당김의 시발형이다. 그런데 저녁 때 불을 지피는 게 아니라 ‘밤’이라? 그것도 깊은 밤일 터! 3월의 서설(瑞雪)인 천사의 은총을 받은 두 화자는 이제 둘만의 가장 아름다운 밤을 갖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놓는다. 어허, 아궁이 이미지가 묘하다. 질(膣)? 아래가 뜨거워진 아낙은 한밤중에 불을 들쑤셔 넣는다. 내 몸도 덩달아 달아온다, 갑자기. 식물학적 상상력이 동물학적 상상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불과 아궁이, 온몸이 뜨거워진 아낙―. (비디오, 섹스 그리고 거짓말!) 끈질기게 오래 산 마르크 샤갈(1887-1985)은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의 곁엔 모딜리아니가 있었고 큐비즘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쉬르레알리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샤갈은 환상적이나 결코 부드럽지 않다, 전위파를 놀래켰을 정도였으므로. 그는 슬라브의 광활한 지역 정서를 가진 삶에 유태인 부모의 피를 가진 만큼 환상과 신비감 등의 화풍을 즐길 수 있었다. 샤갈은 신비의 음계를 잘도 딛는다, 짚는다. 이것이 김춘수를 끌어당긴 샤갈의 신상조사서다. - 생태학적 피라밋 생태학의 본성은 식물성이다. 요즘 주변은 온통 동물성만 득시글, 바둥댄다. 인간이 지향하는 극지점은 식물학이 원초(原初)다. 그 원초의 극단과 저변에 식물성 플랑크톤이 곰질거리며 있다. 스스로 오만하게 영장(靈長)이 된 인간은 이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법이다. 예를 들면 우리 내부엔 저마다 한 그루 나무가 심어져 있다. 나무와 대화하고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를 걱정한다. 나무는 그때마다 팔을 흔들고 발을 신발 밑으로 죽 뻗는다. 나무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 수목이 갈 봄 여름 없이 피고질 때, 결국 인간은 죽어 나무숲으로 흐물흐물 변한다. 육탈(肉脫)한 즙액은 어느새 나무몸에 뿌리혹박테리아로 기생하며 살다가 산골물로 ㄸㄸ, ㅭ ㄹㄹ, 소리죽여 끝없이 흐른다…. 위에서 밑으로, 점점 넓은 넓이를 향해. 올라갈수록 강자에 의해 개체가 감축되는 <먹이사슬>의 엄연한 존재에 대해 나는 진정으로 암담한 미래를 예견한다. 이것은 반드시 피라밋 구조를 띤다. 이른바 생태학적 피라밋(Ecological pyramid)이다. …태초에 하늘님이 있었다, 말씀이 있었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있었다. 동물성 걔네들도 있었다. 태양의 광합성 작용에 의해 비로소 녹색은 표출되었고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해왔다. 그런데 김춘수는 이미 녹색을 표방한 생명의 연장선을 밟고 있는 터였다. 이제까지 우리가 시인의 녹색 성향을 짐짓 모르는 체 했을 뿐이다. 시 <처용>은 자신의 ‘잠 깨기’를 통해 인식의 늪에 젖는 화자의 모습을 그린다.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전문) 결국 ‘깬다’라는 시어를 가지고 시인은 새로운 인식 능력을 드러낸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이 시구는 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한 구석을 보인다. 숲속에서 듣는 해조음이란 정말 감미롭기만 할 것이다. 오로지 바닷소리만 들려와 숲을 뒤흔들고, 숲은 마지못한 즐거움(!)으로 깨어난다.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란 무엇일까. 복수 ‘인간들’이 아닌 단수 ‘인간’을 지칭한다.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나무들 사이에서 ‘깨듯이’ 시적 화자 또한 새롭게 인식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금빛 깃을 치는 새들이 어찌 깊은 화자의 내면을 알기나 하겠는가. 그러니까 ‘남의 속도 모’른다 했지. 작품 이면에 ‘금빛’ 화사함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둔다. 김주연의 지적대로, 김춘수의 무의미시 역시 순수시에 속한다는 말4)도 무리는 아니다. 감각의 관념화, 이를 김춘수는 성공시키고 있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인동잎> 전문) 시 <인동잎>은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더욱 슬프다’란 어설픈 비유, 즉 시인 자신을 드러낸 점이 걸리지만, 붉은 색과 흰색의 대비로써 매우 깊은 감각의 인지(認知) 능력을 보이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 강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단순 묘사에 시의 모든 힘을 쏟는 포즈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시인 자신이 묘사에 치우친 배경 설명을 참고해보자.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 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로 나아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5) ‘관념 공포증’이란 용어로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했다는 점이 인상깊다. 애써 의미 배제를 시도한다고 풀이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난 궁금증이 인다. 시에서 비유 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을까. 의미를 끝까지 배제해 나간다면 그건 결국 산문정신을 지향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 자신이 ‘그 처음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백지처럼 엄정한 서정연습을 통해 새로운 ‘생명 연습’을 시도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이 생명 연습이란 당연히 본고에서 일컫는 바 생태주의의 기초 몸짓(연습)이다. 어떻게 이런 풀이가 가능하단 말인가. 가능한 까닭은 ‘월동하는 인동 잎의 빛깔이/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더욱 슬프다’에 있다. 겨울을 나는 ‘인동 잎의 빛깔’과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이 서로 만나면서, 비교급을 통해 모습의 더욱 슬픈 양상을 대비시킨다. 왜 슬픔일까, 마무리에서 감정이 쉽게 드러난 점은 아쉽지만, 시인이 추구하는 생명의 바탕이 인동잎의 ‘붉은 열매’를 쪼아먹는 행위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자. 이 시에서 보인 생명성은 식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그만 우리에게 들키고 말았다. - 물, 그 식물성 이미지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생선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 시원한 눈을 뜬다.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순결이다. (<처용 3장-3> 부분) 이 작품이 말하기를, 존재의 근원을 인식, 시인에게 현현시키는 게 바람이란다. 시인이 인식한 싱싱한 이미지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식물, 곧 흔들리는 나뭇잎이다. 덩달아서 ‘생선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시원한 눈을 뜬’단다. 이곳이 내가 긴장하는 부분이다. 김춘수가 의도했든 아니했든, 그가 식물성으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하여 강한 생명(부활) 의식을 추구하는 자세는 거의 생래적이다. 한국식 전형(典型)의 생태주의다.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있어야만 멈칫하거나 유영할 수 있다. 지느러미 없는 삶이란 물고기에게 곧 죽음이다. 더구나 생선가게(활어센터?)에서 죽음을 기다리거나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생선들이 이 바람 탓에 ‘시원한 눈을 뜬다’고 한다. (원래 물고긴 항상 눈을 뜨고 있다.) 시인은 드디어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라고 찬미한다. 김춘수에게 바다란 상상력의 텃밭이다. 상상력에서 오는 이미져리와 상징성이 무의식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대’는 누구일까. 제목 <처용>과는 아무래도 무관한 것 같다. 1-3연을 관통해서 보아도 뚜렷한 그대가 없다. 미지의 이상향도 아니다. 융 학파의 시각(The Jungian View)에 의하면, 신화와 집단무의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점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다. 지각하거나 눌린 욕망들이 무심히 만들어낸 무의식(또는 집단무의식)으로 하여, 융은 싸이키(psyche=인간의 의식적/무의식적 심리 활동의 총체성)가 지닌 구조의 완벽성을 믿었다. 시에서의 구조성이란 정신적 측면에서 인식 능력의 완전한 결합성일 것이다. 무의식이란 원초적 이미지로 원초적 상징을 복수감각으로 규정화한다. 두루 아는 바, 융은 이를 원형(archetypes)이라 불렀다. 생각키로, 김춘수 역시 시에서 의미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반면에 완전한 이미지의 구조를 의식치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키로, 그는 무의미를 생각한 만큼 완전한 이미지 구축에 애썼을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관념을 낳았다. 왜? 관념 자체가 앙상한 이미지의 뼈대이므로. 이미지의 뼈대란 곧 관념이므로. (이런 측면에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란 전도된 실상, 즉 도립실상(倒立實像)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지의 무한대의 방출이 아닌 집결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모순이 된다.) 생각키로, 물은 무의식이다. (가끔은 의식일 때도 있다.) 흔히들 ‘의식/무의식의 바다’라고들 되뇌는 걸 보라. 바다는 풍요(豊饒)다, 바닷물은 깊이의 의미를 추가한다. 깊고 너른 물일수록 시원(始原)을 겨냥하고, 이것이 시간성과 만남으로써 포만한 생명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물고기를 남성 성기로, 조개를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볼 때 물고기가 생명 의식을 풀무질한다고 인식하는 선상에 이 작품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젠 ‘물’이 동물성인지 식물성인지를 가름할 판결만이 남았다. 물은 여성의 생산적 이치로 보면 되지만 동식물성인지를 판단하긴 어렵다. 이 근거는 동양철학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인지하는 물에는 정화력(淨化力)이 있었다. 맑은 우물에서 새벽녘에 떠놓은 한 사발의 정화수(井華水)는 기도가 명료하게 이루어지는 힘을 부여했다. 중국은 물을 식물성 생명의 이미지(!)로 읽는다. (물의 싹이 있을까, 물의 가지도.) 중국은 공맹노장이 물의 대표적인 사상가다. 프랑스에는 가스통 바슐라르6)가 있었다. 물에 대한 장(章)은 없지만 막스 삐까르7)는 ‘침묵으로서의 물’을 논구한 것 같다. 실로, 물의 뿌리 은유(Root Metaphor) 또는 뿌리 상징(Root Symbol)은 무엇일까. 서구식으로는 사물을 신화로 읽는 방법론과 연결해도 되겠다. 서양 철학의 사유 패턴으로 읽으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유추와 상상력은 동양이 먼저 소유했던 사유 체계다. 주지하디시피 공자는 지혜로운 자를 동적(動的)으로, 인자한 이를 정적(靜的)으로 보았다. 전자는 물을 즐기고 후자는 산을 찾는다. 공자와 순자 사이의 대화에는 큰 물의 흐름에 대한 <관조론>이 자주 등장한다. 생명을 주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덕(德)이라 했고 언제고 위에서 밑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는 의(義)롭다고 했다. 물의 마음은 기(氣)를 찾는다, 도(道)를 구하고자 한다.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침전물을 정화하는 기포들의 결투가 펼쳐진다, 내적 암투다. 그러면서도 목수가 수평의 척도로 사용하는 절대치 역시 물이었다, 이것은 곧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엄정한 법(法)에 해당한다…. 이런 내용을 관조 없이는 전혀 그윽하게 바라볼 순 없다. 이것이 곧 <무위(無爲)>다. 이로써 노자가 물을 도(道)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런 사유의 모델이 물이 곧 식물성임을 드러내는 요소들로 생각한다. 고대 갑골문에서 [생(生)]의 초기 글자 원형은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풀(식물)을 흉내낸 상형문자라고 한다. ‘生’의 맨 아랫금 가로는 땅을 뜻한 표기인데 이로써 중국인들이 생명의 꽃피움과 열매 맺기 의식을 일굴 수 있었다. 영어에는 원래 동식물을 한꺼번에 포함하는 단일어가 없다8)고 한다. 우리 식으로 편하게 ‘life'를 쓰지만―. 생물(living things) 또는 생물학(biology)이 있지만 ‘생’의 영어 표기는 고작 ‘living/life’ 정도다.) 바리공주 신화(이야기)는 물이 재생적/부활적 존재임을 알린다. ‘자연(自然)’의 뜻풀이는 ‘스스로 그러하다(그렇게 되다)’다. 자연은 고착하지 않으며 인위(人爲)란 있을 수 없다. ‘될 위(爲)’에 ‘사람 인(人)’자가 붙으면 위(僞), 인위란 거짓? 스스로 몰라보게 변모를 취하는 존재는 식물이다. 혹시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식물성?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인간(human being-이 단어에는 ‘(신의) 창조물’이란 뜻이 내재한다)이 식물성주의의 근본으로 회귀하라는 의미인 것…. 김춘수는 이 작품에서 ‘바다에 물구나무선 아침 하늘,/아직은 나의 순결’이라고 적는다. 앞 구절 다음의 쉼표로 보아, ‘아침 하늘’이 ‘아직은 나의 순결’ 같은 믿음의 존재라는 풀이가 가능해진다. 하늘이 물구나무섰다고? 아침 햇빛의 형상화인가. ‘순결’이란 낱말과 잘 어울리는, 멋진 구절이겠다. 마땅히 하늘이나 바다의 푸름 들이 ‘아직은 나의 순결’이 된다고. 김현자는 물고기를 ‘신화적 생명력’으로 읽었다. 시구 인용의 출전을 <처용단장>으로 오기(誤記)한 것은 흠이지만 ‘물고기는 너른 바다를 거쳐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고, 지느러미와 비늘의 빛은 아침 햇빛과 함께 날렵한 새의 이미지로 확대된다’9)는 점이 새롭다. (그러나 ‘비늘의 빛~함께’는 지나친 해석이다. 차라리 ‘지느러미는 날렵한 새’의 이미지거나 ‘날아가는 물고기’ 이미지로 보았더라면―.) 물론 이 작품이 김춘수 시의 대표작일 순 없지만 <처용> 시리이즈는 그의 원초적 생태주의 성향을 강력히 입증하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처용 3장-3>에서 등장하는 물 역시 식물성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김춘수가 본디 식물학적 상상력의 시인임을 굳게 믿는다. 그의 시적 사유는 물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식물성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참고로, 물방울의 화가 김창렬은 자신의 소재가 ‘무의미/무상감’을 표현해냈다. 김춘수가 무의미시론에서 무의미적 유추와 묘사를 자유연상기법으로 펼친 점에 비해 김창렬은 물방울을 통해 영롱한 물의 의미를 재탄생시킨다. 이쪽 방향도 생각해볼 만하지 않은지. 사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 자체는 유(有) 의미를 표방하고 있다.) - 젖음 이미지 물은 음(陰)이다. 노자를 빌어오지 않더라도 물은 빈틈없이 아래를 적신다. 김춘수 시는 특별히 ‘젖음’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눈물> 전문) ‘눈물’은 기쁨의 그것이다. ‘밤에 보는’‘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은 모습을 훔쳐보는 시각은 다분히 관음(觀淫)의 그것이다. (아무렴, 바라볼 만한 은밀한 거리가 있다는 건 꽤나 신나는 일!) 오오, 아랫도리가 젖어있지 않으면 빛나는 섹스를 나눌 수 없다. 기쁨은 섹스의 절정에서도 흘린다, 현란한 열락을 맛보게/엿보게 한다. 여기서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는 건 미지의 심연인 바다를 맨발로 걸었음을 입증한다. 그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든 예수밖에 없다. 그가 ‘새가 되었다고 한다.’ 새는 비상 이미지와 직결된다. 왜 하필 오갈피나무일까, 모르겠다. 5월에 피는 야한 황록빛 꽃때문? 배롱나무보다 더 에로틱한가? 이 작품이 단순 에로티시즘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새가 된 사람 예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새’는 혹시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예수’가 아닐까. 김춘수는 남녀간의 젖어있는 아랫도리에서도 극단의 신성한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표출한다. 이 눈물은 기쁨으로 한껏 젖은 귀한 물질이다. 다음 <처용단장-제1부 눈, 바다, 산다화>도 젖음 이미지가 잘 드러난 연작시다.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2장)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8장/하략) [2장] 자줏빛 꽃의 오갈피나무와 동백나무 꽃인 산다화의 짙붉은색―. 식물학적 의미 부여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갈피는 오갈피고 산다화는 산다화다. 산다화는 보오얀 귀기(鬼氣)를 띠었을 것 같다. (‘보얗다’는 말뜻은 ‘희끄무레하다’, 즉 베이지에 해당하므로 동백나무 꽃송이 색이 아니라 꽃턱 부분을 지시한다.) 적당한 귀기란 매혹을 극한 고혹(蠱惑)이다. 시에서 의미를 배제하려는 노력을 한 시인의 시적 이즘(ism)을 나는 <매혹적 허무주의>라고 일컫고 싶다. 그가 표현한 슬픔조차도 달콤한 매혹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보얀 목덜미를 적시는’ 눈과 적색꽃빛의 찬란한 대비(對比)에 있다. 황홀한 감각의 분출―‘생명성’의 장. [8장] 무수리는 황새과의 물새다. 화자가 어렸을 적에 바라본 바다는 ‘어리디’어릴 수밖에 없으며 바다 또한 제 손바닥에 고일 정도의 크기일 것이다. 시간은 가고 바다도 자랐다. 그만큼 ‘나(화자)’도 자란 것이다.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할 정도로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다 이미지를 환기한다면 ‘바다에 젖은’‘새하얀 모래톱(을) 달’리는 화자가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혼자서만 부르’는 모습에서 우리는 아련한 어린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겠다. ‘즐겁고도’‘빛나는 노래’는 왠지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온다. 추억은 아름답다지만 그건 과거라는 시간을 함유했기 때문이리라. 자신에게 과거라는 시간이 한 개의 필름 커트로 각인된 탓이다. 그런데 왜 ‘노래를’‘혼자서만 부르고 있’는 걸까.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는 것일까. 이 8장은 추억 어린 동심이 그려져 있어 살갑게 아프고 함초롬히 아름답다. 정리하면, 김춘수의 시적 발상은 다분히 물(바다)에서 비롯한다. 그에게는 머무르지 않고 늘 생동감을 보여주는 ‘바다’가 삶과 시(詩)의 모티브로 다가선다. 앞에서 말로 선보인 대로 물은 식물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이 글에서 아주 중요하다. 김춘수 시의 슬픔은 아름답다. 울지 말자.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려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11장) 20대 초반 언젠가 나는 이 시구를 읽고 그만 울고 말았다. 시에선 자꾸 ‘울지 말자’고 했지만 난 그저 사뭇 울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제주의 갈치회랑 고등어회가 먹고 싶다. 그래, 제주공항 부근 항동 그 횟집으로 가자. 어둠 속 내 곁에 모올래 핀 산다화…, 그 ‘산다화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려지고/바다는 비로소/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시행은 울고 싶음의 역설(逆說)을 취한다. 그래그래, 밝은 날의 알몸을 드러낸 바다가 ‘설청의 하늘 깊이’가 몹시 서럽다고? ‘雪晴’이 강렬한 색감으로 성큼 나의 실핏줄을 타고 든다. 아니지, 산다화가 아니 지더라도 우린 또 울고 말 것이야. 바람 불면, 흰 것/붉은 것이 엄청 엄청 서러워서―. 으음, 바다에 젖고 싶어. 당신, 알지…? ‘눈물’은 감정의 과잉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생래적 물질이다. 시인은 바다를 보면 눈물부터 앞서는 모양이다. 그래서 강태가 <나의 꽃은>(1988)이란 시를 썼는지. ‘그래그래 나의 꽃은 어디 있을까/그래그래 내 눈물은 내 촉감과 성욕은/물흐름 뒤집어 시푸른 녹을 배앝아도/그래그래 못박혀 허우적이던 내 몸뚱인/어디 있을까/(중략)//하지만/그러쥐고 꼭 엉기어 꽃 잎잎이 되어 떠나간/그래그래 어디 갔을까 나의 꽃은’. 그 외에 ‘눈은 산다화를 적시고 있다’(<유년時>)/‘아침 햇살이 라일락 꽃잎을/흥건히 적시고 있다’(<라일락 꽃잎>)/‘디딤돌이 달빛에 젖어 있다’(<디딤돌 1>)는 등등의 시구는 적심의 능동/피동체(소재)가 대부분 식물성이라는 점과 생동하는 몸짓을 보이는 점이 독특하다. 또 작품 <이중섭 5>10)는 ‘충무시 동호동/눈이 내린다./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입술이 젖는다’는 그림이 펼쳐진다. 추억이 ‘아내’의 입술에 서리는 곡진한 그리움의 시다. 윤들윤들, 김춘수 시인의 생명성이 시적 대상을 만날 때마다 그 빛을 발하는 듯. [붙임] 김춘수가 너무 자주 쓰는 말 ‘있었다’의 빈번한 등장! ‘있었다’란 현재를 종결시키는 순간 이미 과거로 들어간 시점, 현재완료를 뜻한다. 엄하고 냉정하지만 관념의 끝에 땡, 하고 종 치는 그의 사물 묘사와 인식력이 내 몸 속으로 대상을 집어삼키는 파충류의 기인 혀처럼 징글맞다(!). 그의 사물 인식의 힘은 종결어미에서도 이토록 빛난다.11) 올해는,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언제 내릴 것인가. 나는 시인이 발견한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의 감각이 바로 김춘수 생태학의 클라이막스라고 선언한다. - 신생태주의 지금까지 김춘수 시의 생태주의의 가능성을 살펴 보았다. 비록 그의 초중기 작품을 대상으로 했지만 식물학적 상상력을 단초로 생명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이를 단순한 생명중심주의가 아니라 식물성으로부터 이미지 추출법을 사용한 신생태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러한 녹색 사유는 한스 요나스(1903-1993)의 형이상학적/윤리적 생태주의나 머레이 북친(1921년생)의 사회생태학적 사고보다는 생태주의에 입각한 한국식 고유(固有)의 생명 담론이라고 규정짓고자 한다. 김춘수는 녹색 식물학보다 생명성 짙은 상상력을 식물성에서 추출하는 시법을 생각했다. 김춘수 시의 생태주의 가능성을 타진한 나의 시도가 다소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역설하는 바는, 막연했던 생태주의 사고를 모든 시인 자신이 소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이런 생태주의와 에코토피아가 인류에게 요긴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속히, 보다 명쾌한 인간중심주의12)가 지구촌 곳곳에서 생성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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