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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의 시...

부산인터넷뉴스 2007. 4. 14. 02:57
[【교안강봉환교수】] 정현종 시인의 시 훔쳐보기


정현종 시인의 시 훔쳐보기 -미당문학상 제1회수상자
시인 정현종의 시와 인간, 그리고 그 자신의 글을 소개합니다. 참고하시고 시의 감상에
임하세요. 사물 새로 읽는 법을 터득한 시인의 눈매를 생각해보세요.

<정현종 대표시> -----------------------------------------------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자 자선시]

* 빛-꽃망울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당신을 통과하면
내 사랑 살아나고
춤추고
환하고
웃는다.
터질 듯한 빛--
당신, 더 없는 광원(光源)이
빛을 증식한다!
(다시 말하여)
모든 공간은 꽃핀다!

당신을 통해서
모든 게 새로 살아난다, 내 사랑.
새롭지 않은 게 있느냐,
여명의 자궁이여.
그 빛 속에서는
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

* [제1회 미당 문학상 당선자] - 정현종 시인의 詩세계

"내 최근의 시가 칭찬 받은 것이니 좋고, 시 한편의 값을 이만큼 높인 것도 유쾌한 일입니
다. 다만 소설과 차별한 것은 잘못된 것 같고, 다른 시인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 현대시에서 미당의 시는 유례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뮤즈가 있다면 바로 미당 아니
겠습니까. 정치적 실수에 대해서는 참 어처구니없고, 비판받을 만하지만 그렇다고 미당의
시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요새 죽이는 말들이 넘치는데 창조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는 부정과 함께 긍정적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 시 한편의 값으로는 한국, 아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이번 수상작 견
딜 수 없네 를 읽고 독자들도 단박 알아차릴 수 있듯 정현종 시인의 시는 곧바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 자체도 리드미컬하지만 가곡이나 대중가요로 불려도 아주 좋을 것이다.
정씨의 시는 그만큼 품격과 함께 대중적 울림도 지니고 있다.
"우리네 삶은 늘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살아가면서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시가, 예
술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삶을 견디게 하는 힘 아니겠습니까. 시인, 시 자체
가 무거워 가지고는 삶의 무거움을 견딜 수도,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시인은 무거운 것을
가볍게 실을 수 있는 부하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에서 나는 늘
가벼움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무거운 삶을 가볍고 환하게 들어올리는 시, 그래서 고통까
지도 환하게 투사해 축제가 되게 하는 시와 언어를 정씨 자신은 깃-언어 빛-언어 라 부른
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억압은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상적 삶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우
리는 바란다. 지칭하는 대상에 그대로 꽉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언어도 시에 들어오면 자
유를 꿈꾼다. 억압과 대상을 떠나 환하게 날아오르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언어, 그래 삶에
활력과 자재로움을 주는 깃털과 빛의 언어가 정씨의 시다. 65년 현대문학 을 통해 문단에
나온 정씨는 시에서 변함 없이 언어의 탄력 에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다. 초기 시집 『고통
의 축제』의 제목처럼 고통 과 축제라는 이율배반을 동시에 아우르는 시적 탄력성, 마침
내 고통을 축제로 뒤바꿀 수 있는 시를 통해 인간의 삶도 그렇게 환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내 젊은 시절의 시들은 애를 많이 써서 쓰여졌으며 다듬으려 고심한 흔적도 여러 군데 있
어 지금 보면 면구스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뒤로 오면서는 시가 우러나온다고나 할까,
그렇게 쓰여집니다. 좋은 시를 가리는 기준은 많겠지만 술처럼 잘 익어 저절로 나오는 것
이겠지요. 이번의 수상작도 저절로 나와 거의 고친 데가 없는 작품입니다. "
그러나 어찌 좋은 시가 저절로 나올 수 있겠는가. 부하능력 이 충전된 상태에서 정신과 감
각을 민감하게, 한껏 열어놓아 그 에너지가 정점에 이른 순간 세계가 익어터지듯 시가 터
져나오게 해야 읽는 사람도 신명나지 않겠느냐고 정씨는 말한다. 수상작 전편에 견딜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듯 정씨는 요즘 시에는 시간이 많이 나온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
오 파스는 "시간은 역사가 발가벗은 모습이다" 고 했다. 정씨는 "시의 언어는 역사에 뿌리
를 박되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고 한다. 역사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 등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일이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그런 일들만 벌이는가.
시간 속으로는 역사를 포함해 모든 인간적, 우주적인 일들이 흘러간다. 때문에 삶과 세계
를 입체적으로 살피는 것이 시간에 대한 관심이라 정씨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
떤 시를 쓰려 하는가" 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올해 최고의 시인에게 던졌다. "한 편
의 시를 쓸 때도 그 시가 어떤 모습을 띨지 모르는데 앞으로의 시 계획이라니 무슨 말입니
까?" 자유의 현상 그 자체인 시, 그 시를 일상의 계획을 짜듯, 아니면 역사나 과학 등 시 아
닌 것들에 붙들어매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도 있기에 던져본 우문(愚問)이다. (중앙일보·
이경철 문화부장)

*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그리움의 그림자

형체 있는 건 형제 없는 것의 그림자
소리 있는 건 소리 없는 것의 그림자
색 있는 건 색 없는 것의 .......
그렇다면?
보이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
들리는 건 안 들리는 것의 그림자
그리움의 그림자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아 그리움의 그림자

* 사물(事物)의 꿈·1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날 개

향나무 꼭대기 가지 끝에 앉아 있는 작은 새가 바람에 막 흔들리는 가지와 함께 막 흔들리
고 있다. 흔들리는 것도 두렵지 않고 떨어지는 것도 무섭지 않다.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 자연에 대하여

자연은 왜 위대한가.
왜냐하면
그건 우리를 죽여주니까.
마음을 일으키고
몸을 되살리며
하여간 우리를
죽여주니까.

*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갈 데 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듯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비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 잡 념

잡념의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의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 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 봐

저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꺼지고
출입을 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요,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 詩, 부질없는 詩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 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은
저 혼자 아름답다.

* 헐벗은 가지의 애로시티즘

겨울나무에 보인다 말도 없이
불꽃모양의 뿌리
헐 벗은 가지의
에로시티즘

그래 천지간에 거듭
나무들은 봄을 낳는다
끙긍거리지도 않고
잎 트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낳는다.
항상 외로운 사랑이
사람 모양의 아지랑이로 피는

내 사랑
헐 벗은 가지의 애로시티즘

* 고통의 축제 - 편지 (초기시)

계절이 바뀌고 있읍니다. 만일 당신이 생의 기미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씬을 만나면 나는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색즉공, 공즉. 색공지간 우리 인생. 말이 색이고 말이 공이지 그것의 실물감
은 얼마나 기막힌 것입니까.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당신한테 공쓰겠읍니다. 당신에게 공
쓰겠읍니다. 알겠읍니다. 편지란 우리의 감정결사입니다. 비밀통로입니다. 당신한테 공쓰
겠읍니다. 안그렇습니까. 당신한테 편지를 씁니다.

식자처럼 생긴 불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시민처럼 생긴 눈물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불덩어리 눈물에 젖고 눈물덩어리 불타
불과 눈물은 서로 스며서 우리나라 사람 모양의 피가 되어
캄캄한 밤 공중에 솟아오른다.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도다, 라는 코러스가
이따금 침묵을 감싸고 있다.

나는 감금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
니다. 영원히. 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까뮈)고. 생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나의 데뷔작> -------------------------------------------------

* 대기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 - 정 현 종

나의 데뷔작은 「독무」, 「화음」, 「주검에게」 등이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나
왔는데, 그 해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해이기도 하다. 그때 그 잡지의 추천제도에 따라 2회
인지 3회인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추천을 받았으니, 첫 회는 대학 재학 시절이었을 것이
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니 젊은 시절의 스산한 마음의 풍경이 멀리, 조금은 낯설게, 엷은
먹물이 번지듯 보이는 것 같다.
정치, 경제의 피폐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상황과 맞물려, 정신적으로도 무거웠던 전후
(戰後)의 현실을 배경으로, 허무감이나 무상감, 죽음 같은 것들이 그 작품들에는 감돌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실존적 질곡을 벗어나 도약하려고 하는 의지도 보
인다.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새로운 표현을 하려는 의지와 함께.
그러한 가벼워지려는 본능, 도약하려는 의지가 낳은 게 '바람'과 '춤'일 것이다. 다 아시다
시피 바람(공기)은 우주와 생물을 구성하는 원소들 중 그 가동성(可動性)에서 제일가는 것
이고, 춤은 순간순간 추락을 극복하면서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러니까 우리를 무겁
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불꽃을 부추겨 타오르게 하는 바람은 우리 몸 속의 불꽃과 정신 속의 불꽃도 부추겨 타오
르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다. 기장(氣象)의 변화가 우리
의(모든 생물의) 마음에 일정한 영향을 준다는 건 다 아는 얘기지만, 바람이 불 때 - 미풍
이 불 때는 미풍만큼, 태풍이 불 때는 태풍의 강도만큼의 변화가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다. 만일 제법 센 바람이 부는 날 거리를 헤매었다면 바람이 점화하고 부추긴 몸 모양의 불
꽃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 앉아서 태풍 소리를 듣고 있다면 그 역시 앉아 있는 불꽃
이다. 그리고 이때의 불은 욕망이나 정열의 상징이거나 등가물이라기보다는 신비적 직관
과 우주적 공기에 물들어 있는 영적 에너지다. 풍력으로 만들어지는 전기와 같은 에너지.
가누지 못할 만큼 무거운 몸은 이미 몸이 아니고 가누지 못할 만큼 무거운 마음은 이미 마
음이 아니다. 탄력과 가동성은 몸과 마음의 가치나 쓸모의 지표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바람과 같은 가벼움과 운동 그리고 (비슷한 내용을 좀 달리 말하는 것이겠지만) 자재(自
在)로움을 항상 바란다.
춤은 말하자면 몸이 일으키는 바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춤추는 몸은 곧 바람이다. 우
리를 무겁게 하는 욕괴(欲塊)인 몸이 욕괴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춤은
보여준다.
이미 한 얘기지만, 사춘기 때, 특히 성욕 때문에(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천주교 때문에)
나를 무겁게 하던 몸이 무용예술을 통해 무거움에서 일거에 해방되면서 육체를 '발견'하
게 되었던 것인데, 춤(예술)과 불이 다같이 가지고 있는 정화(淨化)의 힘은 괜히 해보는 소
리가 아니라는 걸 실감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과 싸우는 물질에 의해 꾸어진 꿈"(발레리)이라고 한다면 춤
은 몸이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꾸는 꿈이며 시는 그러한 몸과 영혼이 낳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춤이라는 것이 아무데도 이르지 않으므로 이르지 않는 데가 없는 움직임이라고 한
다면 시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데뷔작을 포함해서 초기 시편들이 어렵게 쓰여진 대목도 있고 말이나 문장이 어색한 구석
도 있어서 겸연쩍기도 하지만, 바람(공기)이나 춤의 성질은 실은 변함없이 시적 언어의 움
직임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등단작품에 '바람', '춤',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나 묘사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바람에 그것
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등단작] <화음> - 발레리나에게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일광
은 저의 머나먼 항해를 접고
화염은 타올라 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火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침상에 상심하는 제.

나는 그 동안 뜨락에 家雁을 키웠으니
그 울음이 내 아침의 꿈을 적시고
뒤뚱거리며 가브리엘에게 갈 적에
시간은 문득 곤두서 단면을 보이며
물소리처럼 시원한 내 뼈들의 風散을 보았다.

그 뒤에 댕기는 음식과 어둠은
왼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환히 밝기도 하며
오감의 絃琴들은 타오르고 떨리어
아픈 혼만큼이나 싸움을 익혀가느니.

그대의 숨긴 극치의 웃음 속에
지금 다시 좋은 일이 더 있을리야
그대의 질주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한 그 외에는
그대가 끊임없이 마룻장에서 새들을 꺼내듯이
살이 뿜고 있는 빛의 갑옷의
그대의 서늘한 승전 속으로
망명하고 싶은 그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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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종론 > * 사이 없애기의 시학 - (글쓴이 모름)

정현종의 소개는 따로 필요없을 정도로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시 세
계에 대한 평가 역시 분분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25년여에 걸친 그의 작업을 최근 몇 년 사
이에 그가 언급하고 있는 '생명사상'으로부터 그의 시를 읽고자 한다. 그의 산문으로 시를
바라보려는 의도가 아니다. 초기 시에서 시작된 정현종의 생명사상 혹은 우주의 생명적 일
체감을 판독하기 위해 교과서적으로 그의 시를 바라보던 자세를 역전시켜 보자는 의도이
다. 정현종의 시 세계가 도달한 현재에서 과거를 조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런 귀납적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정현종을 오독할 위험도 있
다. 그러나 오독은 창조적인 작업이므로 두려워 할 이유는 없다.
정현종의 생명관을 해부하기 위한 가장 좋은 칼은 '사이'란 용어이다. 정현종이 존재론의
문제에 천착하여 찾아내고자 한 이 세계의 비밀은 실존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존재와 존재
간의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는 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나 존재와 존재의
관계가 왜곡되고 있는 이유는 서양 근현대 철학이 엮어낸 인간중심주의에 있다고 정현종
은 여러 산문에서 밝히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가 가져온 발전지향적 문명관으로 파괴된 세계를 살리기 위해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솔직하고 따뜻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 있는 것이
다. 따라서 플라톤 이후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즉 신(神) 중심주의
에 물들어 있던 서양사상체계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하여 이룩해 놓은 신(新) 이분
법적 사고방식, 즉 인간 중심주의가 지니는 여러 병폐와 위험성이 점차로 드러나고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독특한 생명관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현종이 말하는 생명관은 새롭지 않다. 환경론자들의 분분한 주장도 있었고, 동양
사상에도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현대물리학의 영향을 받은 환경
론자들의 생명관과 동양적인 생명관은 다르다. 전자가 주장하는 세계는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기계적인 유기체(정교한 컴퓨터와도 같은)인 것에 비해 후자
의 사상은 생명 그 자체의 이합집산일 뿐이다. 개체를 존중하면서도 개체간의 상호 관계
를 인정하여 유한한 세계 속에서 개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 할 수 있다는 사상이, 그러한 상
태가 유지될 수 있는 근거는 만물이 한 생명체 속에 포섭된다는 사상이 동양사상의 주류
를 이루어 왔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도 차별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정현종은
전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생명체, 쉴새없이 변화하는 완벽한 조화체로서
의 세계, 돌 하나가 구르는 소리와 이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감성체계는 후자의 입장에 서있다.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정현종 특
유의 시 세계를 밝혀가야 한다. 그 해결책을 사이 없애기의 시학으로 명명한다.
정현종이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관 혹은 생명관은 이미 규정되어 버린 존재의 개념들의 파
괴에서 시작된다. 일단은 사이를 없애기 위해 사이를 인정한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진실
을 밝히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파악되는 일상적 존재의 개념 그 자체를 부정한다. 정현종
의 초기시에 '죽음'이란 단어와 그이미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의 정현종은 죽음을 단절이나 파괴로 보지 않고 연속 혹은 창조로 보는 동양적 생명관
에서 출발하고 있다.

부서진 내 살결과 바람결이 같아지고
살결과 물결이 和答하고
살은 부서져
풀의 초록, 바다의 푸른이 되고
여러 동물의 울음소리가 되고
살은 돌을 마시는 물이 되고
모든 色을 물들이고
모든 리듬을 흐르게 하고
- <죽음과 살의 和姦> 부분

인간이 죽으면 땅에 묻히어 흙이 된다는 사실은 '버려짐'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에 죽음은
가장 큰 공포였다. 그러나 정현종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모습을 가지기 위한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결코 없어지지 않는 모든 것들의 살
이 된'(「죽음과 살의 和姦」)다고 노래한다. 또 '意識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죽음이
었지만/허나 救援은 또 항상/가장 가볍게/瞬間 가장 빠르게 왔'(「事物의 정다움」)다고
말한다.
죽음으로 산다는 말, 이 말이 가지는 무게는 누구에게나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정현종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정현종은 시간의 문제에 몰입한다. 죽음이 결국 모든 살
아 있는 존재의 집, 혹은 子宮과 같은 이미지로 남기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느끼는 시간
의 개념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음을 시간의 단절, 자의식의 부재상태로만 보아
서는 정현종의 세계, 죽음으로 빛나는 고통의 축제에 들어갈 수 없다. (하략)


<비평의 글> ---------------------------------------------------

* 정현종 시집『갈증이며 샘물인』'거룩한 것을 위하여' - (글쓴이 모름)


1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정현종의 언어는 일상적인 산문처럼 시적인 긴장이 없고 이완
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묘사처럼 보이는 문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시
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시가 일상 세계에 대한 단순한 묘사나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
니라 평범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 사이에 많은 문맥을 생략하고 둘
사이를 돌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그 생략된 빈자리를 독자들이 채워 넣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에 지고 다니던 제 집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엎드려 그걸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주 좁은 그 길을
달팽이는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 만큼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였습니다.
― <어떤 성서>

「어떤 성서」에서 시인은 달팽이에 대한 묘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달팽이가 오늘의
성서라고 말한다.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시적인 함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임
에 틀림없고 그것에 감동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시인은 어떤 면에서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오늘의 성서였습니다"라는 또 다른 구절이
붙음으로 인해 이 텍스트는 시로 변하게 된다. "달팽이가 천천히 기어다니는 것이 어째
서? 별 시원치 못한 시인 다 보겠네" 하고 코웃음 치던 독자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와 달팽이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시인이 무작
정 아무 것에나 감탄사를 남발하는 자연예찬자라는 생각으로는 스스로를 합리화 할 수 없
게 된다. 왜 그것이 오늘의 성서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결코 시인에 대해 웃을 수 없는 입
장임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느림보 달팽이를 성서라고 한 시인의 말을 해결하
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결과 독자들은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느린,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달팽이가 현대의 속도감과 대립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
고 그 느린 태도가 바로 인위적 문명과 대립되는 성스러운 자연의 모습임을 직감하고 우리
가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달팽이는 태초의 세계를 매
개시켜주는 성서가 된다.

바라보면 항상 이쁜
이쁘고 나서 또 이쁜
조그만 간이역
앞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별일이야
벌써 어디론가
선 채로 가고 있네 어디론가
기차에 탄 듯 바람에 불리듯
―<기적-간이역>

「기적」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가고 있는 것은 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다. 정거장
에 있는 사람은 그냥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기
차는 가만히 있는데 풍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선 채로, 기차에 탄 듯이, 바람
에 불리 듯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풍경 자체는 신기한 것도 그 자체로
시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그만 간이역 주변 풍경에 대한 시인의 "이쁘고
또 이쁜"이라는 감탄과 "기적"이라는 돌출적인 판단의 결합은 이 텍스트를 단순 묘사 이상
의 시적인 함의를 가지게 한다. 순간적으로 독자들은 시인이 조그마한 사실에도 감동하는
감동벽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쁜 것을 넘어 기적이라고 표현한
시인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을 기울이
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이 시의 간이역과 기차가 자연과 문명의 대립구조 속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시인이 몸을 싣고 있는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기차로부터 시골 사람들이 먼 곳, 즉
인간의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기적의 세계 속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시
인이 이 풍경을 기적이라고 판단한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2

정현종의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에 대한 찬미를 담고
있는 시집이다. 정현종에게 있어서 현대 도시는 자본과 인간 욕망이 쏟아낸 토사물로 가
득 찬 재난의 세계로 생각되며 인간은 그 거대한 토사물의 홍수 속에 떠도는 난민, 또는 오
토피플(기계문명 속을 떠도는)로 생각된다. 1998년 여름 홍수를 그리고 있는 「우리는 구
름」에서 시인은 죽은 돼지와 사람의 시체를 삼키고 집을 파괴하고 논과 밭, 농사와 노동
을 능멸하며 길을 끊어 놓은 구름과 게릴라성 집중호우를 현대도시와 인간이 빚어낸 대재
앙으로 고발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정치, 경제, 마음이 모두 홍수를 만들어낸 게릴라 구름
이며 지상의 모든 돈벌이 게릴라, 과소비 꼭두각시, 이 구름, 저 구름, 네 구름, 내 구름이
발목을 잡는다고 말한다. 시인이 인간의 발목을 잡는 구름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여기서 끝
나지 않는다. 메탄가스, 이산화탄소 구름, 한숨 구름, 눈물 구름, 물귀신으로서의 인류가
구름처럼 몰려오며 발목을 잡는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산업의 홍수, 시장의 홍수, 박탈,
기아의 홍수, 정치, 경제, 부패 홍수, 부실 홍수, 이판 홍수, 사판 홍수, 시인에게 도시의 모
든 것들은 정도를 넘어선 인간 탐욕이 빚어낸 홍수로 생각되며 인간은 그 흙탕물 속에 빠
져 허우적거리는 난민이지만 인류 자체는 또한 더러운 구름이며, 급류이자 폭우이기도 하
다.

가로수야 그렇지 않으냐
도시 생활이라는 거 말이지
문명의 難民아니냐, 아스팔트의 지옥
맹목과 瞑目의 역청*에
허덕이는 오토 피플
우리는 난민이다.

오 이 지긋지긋한 자동차들,
바퀴벌레들아 그렇지 않으냐,
도시 표면을 다 덮어버린
저 달리고 기고 서 있고 찢어지는 구역질
저 자본의 토사물 속에서 허덕이는
삶이라는 이름의 재난!
그렇지 않으냐 하필이면 도시에 사는 비둘기들아
유독가스 속을 아장거리며
던져주는 먹이에 정신없는 우리의 동료들아
유황의 火力과 馬力과 金力의 불길
그 날름대는 혀의 불타는 바비의 추력으로
우리는 오늘도 생산하고 소비하고 지지고 볶고
자동적으로 이판이고 나 몰라라 사판이며
진짜에서 멀리 진짜에서 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힘으로
이런 절규를 힘껏 숨긴다, "가짜 아니면 죽음을!"
― <가짜 아니면 죽음을!>

「가짜 아니면 죽음을」에서 시인은 도시 생활을 난민, 오토 피플로 규정하고 있다. 이 세
계는 시인에게 아스팔트 지옥, 맹목과 명목의 역청으로 생각된다. 길을 메운 자동차들 속
에서 시인은 자본주의의 토사물을 본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구역질이다. 삶은 하나의 재난
이다. 시인은 사람들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비둘기와 가로수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도
시 문명 속의 가로수, 비둘기 역시 난민이다. 문명세계가 주는 안락과 먹이에 대한 집착 때
문에 고향인 자연 속에 깃들지 못하고 도시 속에 뿌리내린 가로수와 비둘기는 이미 새와
나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문명 속에 갇힌 인간은 고향과 정처로서의 자연을 잃
은 난민이다. 문제는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먹이를 구하고 자본주의의 자동성과
속도와 금력에 빠져 생산하고 소비하고 지지고 볶으면서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데 있
다.
삶 자체는 진정성을 상실하고 가짜가 된다. 삶은 이판 사판이다. 인간은 진짜 삶이 아닌 가
짜 삶을 살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숨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가짜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로 변한다.
"이 귀신아"에서 시인은 인간을 문명에 대한 맹목적인 끈끈한 집착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
고 떠도는 귀신으로 규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시인은 시 속에서 "저 나무
들 보아라/ 생각 없이 푸르고/ 생각 없이 자란다/ (그게 하느님 생각이시니)/ 또 저 꽃
들,/ 꽃들이 어디 생각하느냐/"고 말한다. 나무나 꽃들이 신의 섭리대로 살고 있는데 비해
인간은 생각과 욕망 때문에 자연과의 조화를 상실하고 이 세계에서 떠도는 귀신에 불과하
다는 생각이다.
이 세계를 재난의 세계로, 인간을 난민으로 파악할 때 재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
는 방법은 무엇인가. 정현종에게 있어서 그 해답은 분명하다. 원인 자체가 인간의 탐욕으
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되고,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움직이지 말아야지
요」에서 시인은 전쟁을 하는 나라의 예를 들고 있다. 달리는 탱크 앞에 어린 소녀가 서 있
다. 저 보다 어린 동생을 안고. 시인은 "탱크는 서야지요./ 움직이면 안됩니다/ 다시는 움
직이지 말아야지요"라고 말한다. 실제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아름다움으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 말씀인데요/ 미사일이다 핵이다/ 전쟁이
다 잿더미다 하는데/ 저절로 아끼고 싶은/ 아름다움으로 요새화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시인의 답은 너무나 단순하다. 이 단순성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지만 교언영
색에 어짐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는 공자의 말을 상기하면 진실이란 꼭 복잡해야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정현종은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 인간이 인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
으면서도 문명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것을 외면하는 숙명론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
각한다. "걸음걸이"연작에서 시인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
각하는 인간의 무책임한 맹목과 운명론적 태도를 비판한다.

네 운명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도무지 못 본 척한다고?
그야 별 수 없으니까요.
별수없다고?
― <걸음걸이·6> 일부

인간과 신과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연작시에서 시인은 가끔 네발로 걷고 싶다는 인
간과 신 사이의 대화를 통해 문명세계의 위기와 문제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
하는 인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대화에서 시인은 문제는 "너 자신을 알라"(네 운
명을 알고 자연으로 돌아가라)임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알면/ 도대체 인생이 진행되질
않습니다(그러나까 군말이여/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결단코 알지 않겠습니다)
「걸음걸이 3」"는 인간의 맹목과 부딪친다. 문명세계의 안락을 위해서는 절대로 자연으
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맹목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3

『갈증이며 샘물인』의 또 하나의 주제는 자연과 비문명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
이다. 정현종의 시에서 여름날 저녁 무렵 맥주를 먹고 빈병들을 갖다 주러 갈 때 주인의 미
안해하는 태도에서, 게걸음으로 걷는 여인, 말없는 아이, 농원식당 종업원 아가씨의 소리
치는 소리까지 도시적이 아닌 자연스러움이나 순박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 찬미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별 것 아닌 것들이지만 시인은 그것들 속에서 우리가 도
시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태초의 찬
란한 빛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름저녁 1」에서 시인은 아가씨가 창밖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는
다. 그 소리 자체는 감동을 줄 무엇이 못되는 것 같지만 여름 저녁의 그 공간, 시간 속으로
쨍- 하고 퍼지는 그 자연스러운 소리를 통해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우주
적 생명력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여행 중 씌어진 다음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식당 안 저쪽 자리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린다.
(그것은 어른들이 떠드는 것보다 듣기 좋거니와)
저 아이들은
제가 나고 자란 땅의 말로
재잘거린다.
저 아이들은
제 나라 말로 제 땅의 말로
재잘거린다.
저 아이들은
제 나라 말로 나눈 사랑의 말 속에
잉태되고
자란 동네 아침 공기와 저녁
연기 밴 말
여러 감정과 운명이 밴 말 속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소리가 나오는 목구멍의
결정적인 운명과 함께,
저 말을 하는 입의
기운과 함께,
소리와 뜻
숨쉬는 온몸과 함께
살고 살고 또 살았다.
그 모태는 떠들만한 자리 아닌가
공기 속에 피어나는 폭죽 아닌가
낳고 죽는 자리 아닌가.
― <모국어: 미국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은 어른들이 떠드는 것보다 듣기 좋다거나, 제 나라말로 재잘거리
는 것이 대견스럽게 여겨진다는 이야기는 전혀 독자들에게 감흥을 줄 내용이 못된다. 그러
나 이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찬사가 시인의 감상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라 나름의 세계관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임이 다음 부분에서 드러난다. 아이들은 제가 나고 자란 땅의 말로 재
잘거린다는 것은 어른들이 그렇지 못함을 염두에 두고 있는 표현이다. 아이들은 자연 그대
로다. 숨김없이 자연 그대로 어머니로부터 배운 모국어를 쓰면서 재잘거린다. 그러나 문명
에 절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은 고향의 말, 즉 이 땅의 말, 자연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문
명, 탐욕의 언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우주의 기본음으로부터 유래한다. 아이들은
자연이 준 목구멍을 통해서 나눈 사랑의 말 속에서 잉태되고 그 말을 통해 자라고 그 자연
의 말을 재잘거린다. 그 말 속에서 시인은 문명 이전의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빛나
는 태초의 세계를 본다. 문명에 절은 시인이 모국어에 대해 갖는 감동은 여기서 유래한다.
정현종에게 있어서 자연에 대한 찬미는 흔히 태초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기도 한
다. 「푸르른 풋시간이여」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닭이 울면 새벽이다
저 닭은 아무 때나 운다
아무 때나 새벽이다!

목청 좋고 힘찬 그 소리는
도시에서는 흔히 들을 수 없는 은총이다
하루 종일 자동차 소리뿐인 데서
사람 소리뿐인 데서
무슨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세상의 새벽 아닌가
옛날과 시골과 자연이 한꺼번에
넘쳐 흘러
동트는 마음!
(나는 저 수탉을 본 적이 있다
높고 붉은 부리부리한 눈
하늘 기운 일렁이는 꼬리
위엄있는 거동
그 색깔들!)
여염집 옆 숲 그늘 어디서
목청을 뽑는 수탉이여
이 몸 동트고
세상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푸르른 시간이여
― <푸르른 풋시간이여>

「푸르른 풋시간이여」은 도심 한 가운데서 들리는 닭 우는 소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자
연과는 무관한 도심 한가운데, 그것도 대낮에 듣는 닭소리는 시인에게 충격적이다. 닭우
는 소리는 과거 새벽마다 듣던 기억을 환기시키고 동트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자동차 소리, 사람 소리뿐인 문명의 숲 한가운데 모멸적인 삶 속에서 닭 우는
소리는 옛것과 시골과 자연을 일깨워주고 그 속의 수탉처럼 인간다운 품위를 지닌 과거를
기억케 해주는 하나의 은총으로 생각된다.
정현종이 태초의 시간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가 복고주의자, 문명의 도피자라고 생각해서
는 안된다. 정현종에게 있어서 시간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없다. 그런 구분은 인간이 만들
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문명의 축적인 역사는 폐허이다. 그가
꿈꾸는 태초 역시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태초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 속에도
존재하며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고향으로서의 태초이다. 문명과 인간의 욕심이 자연의 질서
와 시간을 파괴하고 잊게 했을 뿐이다. 정현종에게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이 마음
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시는 그 태초가 오늘 아침에도, 또 무수하게 태어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침 햇빛이여
아직 밝지 않은 날들이 수없이 많고나
싱싱한 태초―새날이여.
내 속에 들어 있는 아이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없는 아이들을
여지없이 떠오르게 하는구나 오늘 아침
벙글거리며
젖 냄새를 풍기며.
― <아침 햇빛·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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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쓰기에 대한 최근 '내 생각'> - (문학동네 게재)

* 시는 왜 우리의 운명인가? - 정 현 종

나는 요즈음의 어떤 문학잡지들의 시/문학의 이른바 위기에 관한 질문방식이 마음에 들
지 않는다. ‘……는 죽었는가?’와 같은 제목은 값싼 선정주의에 불과하다. 대세가 아무
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매체도 상품으로서 다소간의 선정성이 필요한 지는 모르겠
으나, 문학잡지들은 이 시대에 왜 시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다시 말해서 시의
가치는 왜 증대되고 있고 또 그래야 하는가라고, 살림살이가 잘 되어가는 쪽으로 화두를
잡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오는 11월 초 UCLA에서 있을‘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라는 제목의 문학행사에서 얘기할 원고의 앞부분 및 중간의 일부 그리고 맨 끝 몇 줄을 발
췌한 것이다.)

1

나는 지금 이 글을 존칭으로 시작하면서 마음이 흐뭇합니다. 얼른 느끼기에 존칭이 아닌
글은 그 글을 쓰는 사람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존칭의 글은 읽는 사
람을 향해 한없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는 한 커다란 존칭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시의 쓸모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왔습니다만, 거기에 한 가지를 덧 붙인다면, 시는 이 세계를 존칭의 울림 속에 있게 한다
는 것입니다. 즉 시가 말하는 게 무엇이든지 간에 그 속에 들어 있는 욕망, 꿈, 태도가 한용
운의 잘 알려진 시가 말하듯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와 같은 것인 한, 시의 언어는 존칭, 총애의 성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간절한 구절이 암시하는 것은 넓고 깊습니다. 그것은 우주발생론이기도 하고
우주가 현재 운동하고 있는 모습이기 도 하며 또 생물계의 생명활동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
니다만, 지금 우리의 얘깃거리에 초점을 맞춰 얘기해본다면 언어의 탄생 과 정, 특히 시적
언어의 탄생과 에너지 방출 운동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침묵을 휩싸고 도는 노래”에서 우리는 금방 핵에너지를 방출하는 원자운동을 연상합니
다만, 사실 한 편의 시에서 단어, 이미지, 소리, 구절 등 의미의 단위들은 원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 편의 시는 여러 신호들의 네트워크에서 하나의 원자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좀 달리 말해보자면 한 작품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생물과 다름없는 그 유기체의 영
양소이며, 또 생물인 그 한 편의 시는 , 우리가 먹는 다른 음식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
신과 육체를 위한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물론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는 시적 언어의 탄생과 그 운동 및
존재의 생성에 대한 너무도 적절하고 역동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인
이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 침묵 속에 있을 터이므로 시인은 그걸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열
어보기 위해 사랑의 노래로 그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그때 그 침묵은 뭔가를 작은 소리로
발음하기 시작합니다 " 그 웅얼거림 역시 어떤 불가항력의 크나큰 침묵의 일환이라고 하더
라도…… 그러나 뒤의 침묵은 이미 앞의 침묵과 다릅니다. 앞의 침묵이 무(無), 죽음으로
서의 침묵이라면 뒤의 침묵은 시적 중얼거림에 의해 숨쉬기 시작한 있음, 삶으로서의 침
묵,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떠오르는 게 릴케의 시입니다.
“시를 쓴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To write poetry is to be alive)와 “무(無)를 둘
러싸고 움직이는 숨결”(Air moving around nothing)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오르페우
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세번째 작품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떤 신(神)은 그걸 할 수 있다. 허나 말해다오. 나에게, 어떻게 한 인간이 현(絃)을 통해
그의 좁은 길을 갈 수 있는지?

한 인간은 균열이다. 그리고 두 길이 우리 속에서
엇갈릴 때 아무도 가객(歌客)의 신전을 짓지 않았다.
우리가 당신한테 배운 시 쓰기는 욕망하기가 아니다.
행여나 이룰 수 있는 어떤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시를 쓴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신한테는 그건 쉬운 일이다.
허나, 언제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가? 그리고 언제 그는
지구와 별들을 돌려 그들이 우리를 향하게 하는가?
그래, 당신은 젊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한다, 또 소리는 당신의 입을 열게 한다 " 그건 멋지
다, 그러나
문득 노래하게 하는 그걸 잊는 걸 배우라, 그건 오래 가지 않는다, 참된 노래는 또 다른 숨
결의 움직임이다.
무를 둘러싸고 움직이는 숨결, 어떤 신 속에서 숨쉬기, 어떤 바람.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나 “무를 둘러싸고 움직이는 숨결”이나 모두
쉼없이 움직이는 창조적 에너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밖에는 달리 규정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릴케는 또 "두이노의 비가" 중 첫 비가에 서 미(美)를 가
리켜 “……미는 우리가 아직 간신히 견딜 수 있는 두려움의 시작이니……”(……For
beauty is nothing \ but th e beginning of terror, which we still are just able to
endure, ……,)라고, 미에 대한 가장 탁월한 규정 중의 하나를 말한 것입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작품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한국의 정
치적 상황과 떼어놓고 읽을 수 없습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그런 시를 쓰게 한 직접적인 동
기가 그때의 암담한 정치적 상황이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님’
을 정치적 문맥 속에서 읽는 것 또한 자연스런 일이지요.

그러나 그 작품을 그렇게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작품 이, 정치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 " 구호와 선전, 절제되
지 않은 분노 따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씌어진 다른 정치시들이 이제 잊
혀진 데 비해, 훨씬 잘 시간을 견디고 있는데, 그렇게 되게끔 한 것이 다름 아닌 간접적 표
현 또는 다의성(多義 性)이라고 할 수 있고, 앞에서 내가 인용한 구절을 따로 떼어놓고 보
면, 그 구절에 대해 내가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든, 앞에서 나는, 시는 한 커다란 존칭이라고 말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는 것은, 시라
는 것이 생명의 진실에 더없이 가까이 가려는 한 시도이며, 사물이 존재하는 것들이, 굄
(총애)을 받는 공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시인들이 총애하는 방식은 시대와 개성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가령 전통적으로 시
의 시됨(시의 정체성)이라고 할까 시 의 가치를 담보하는 기리는 노래(송가)는 명백한 총
애의 공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부족사회의 구전문학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신이나 자연, 특정 대상이나 인물을 기리는 일은 시의 본분 중의 하나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시인을 들어보면 횔덜린이나 휘트먼, 릴케나 네루다 같은 큰 시인들도 그런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시의 또 하나의 힘인 우상 파괴, 신성모독적 비판과 저항이 있는데, 이런 태도
는 언뜻 보기에 기리는 마음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비판과 저항은 시인이 꿈꾸는
것의 실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힘에 대한 것이므로, 그 속에는 어떤 것에 대한 총애(가
령 진실을 드러내는 도전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재능도 진실에 대한 총애입니다)가 내장되
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드러지게 노골적인 야유나 풍자를 통한 비판, 폭
로 속에 진정한 전복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려면 그 작품의 시적 진정성 " 슬픔과도 같은
큰 긍정이 그것을 깊은 데로부터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천
박한 욕설에 불과해서 일시적으로 시선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 잊혀집니다. 여기
서 우리는 “냉소주의는 천박한 영혼들이 정직성에 접근하는 유일한 형태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도 좋겠지요. 이 도전적인 재능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이름이 니체와 랭보입니다만, 이러한 성질 역시 좋은 시인이 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좋은 시인들은 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했는데, 이 세상은 그 두 가지 일을
아울러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용운의 시 구절을 떠올리면서 얘기하자면, 시인의 총애와 저항, 슬픔과
기쁨, 꿈과 탄식을 촉발하는 ‘님’은 많고 많으며, 그것이 시인들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
다.

2

(시가 왜 불멸의 예술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인류사회 전체의 큰 문제요 한국에서는 더욱
절박한 문제인 자연, 생태계 재난을 예로 들어보는 부분―필자) 죽어가는 자연, 생태계에
대해 시인들이 민감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파괴와 오염의 주범인 인 간 자신의 생명
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협은 절박한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
이 우리가 살기 위해 매일 마시고 먹는 공기와 음식은 동시에 그 속에 사신(死神)이 깃들
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위와 같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정보와 경고는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교육을 통해 환기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덧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시작품들도 또 하나의 상투성으로 떨어졌
다는 느낌이 큽니다.

다만 시적 표현이 갖고 있는 힘 " 이미지, 은유식 수렴을 통한 강렬한 표현이나 독특한 비
판적 수사(修辭) 그리고 정서적 환기의 설득력은 어떤 경우에나 여전히 시 고유의 힘일 터
인데, 그것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다시 말해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가이아, 우리가 겪고 있는 재난의 원인 중 제일 심각한 것이 돈에 대한 욕심
이라면, 시는 이윤의 무한 옆에 생 명의 무한을, 물질의 무한 옆에 마음의 무한을 놓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시가 하고 있는 중요한 일이겠습니다만, 인간의 이윤, 지배를 위
한 욕망은 줄어들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시, 미적 창조의 가치는 점점 더 증대할 것입니다.

모든 게 개발 대상이고 돈벌이의 재료이며 착취의 대상일 때, 정부와 기업들이 경제, 이
윤, 기술에 미쳐 있을 때, 파블로 네루다의 "나와 함께 태어나는 것"이라는 작품은 만물에
대한 총애와 생명감에 넘쳐 미적 가치를 제고하면서 우리를 신나게 합니다.

나는 이 자유로운 순간 나와 함께
태어난 풀에 화창하고, 치즈의
발효, 초의 발효, 첫 정액의
분출의 비밀에 화창한다, 나는
마악 젖꼭지에서 솟아오르는 백색
속에 나오고 있는 우유의 노래에 화창하고
외양간의 생산성에 화창하며, 커다란 암소들의 갓 누운 똥 " 그 냄새에서
수많은 푸른 날개가 날아 나오는 그
갓 누운 똥에 화창한다,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아무 변경 없이
꿀을 갖고 있는 땡벌에 화답하고, 소리없이 싹트고 있는 地衣類에 화답한다.
끊이지 않고 윤리는
영속하는 북소리와도 같은
존재에서 존재로 이어지는 진행, 그리고 나는
그 태어나는 것들과 함께
태어나고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 나는
자라는 것들과 하나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퍼져나간 침묵과 하나이다 " 짙은 습기
속에 群生하면, 번식하는, 줄기들 속에, 호랑이들 속에, 젤리 속에 번식하는 것들 의 미만
한 침묵과……

― <나와 함께 태어나는 것> 중에서

여기서 치즈, 초, 우유 등은 경제적 생산성의 산물이 아니라 심미적 생산성의 산물이며, 죽
임과 이윤의 맹목적인 질주 대신 “ 태어나는 것들과 함께, 태어나고 태어나고 또 태어”
나는, 그리고 “자라는 것들과 하나”인 생명의 노래가 국가, 정부, 기업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실은 저 공생의 자연, 조화의 우주에 화창(和唱)하는 노래이지요만……

3

……어떻든, 19세기의 큰 선사 니체가 얘기하는 창조적 광기나 일탈도 선(禪)적인 것이라
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선시가 우리 마음에 가벼움의 공기를 불어넣고, 일거에 해방하며,
매순간 이 세상이 우리 앞에 처음 있는 듯이 우리를 끝없는 처음(시작) 속에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시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정현종 시(詩) 패러디] -----------------------------------------

* 김언희 詩 <그 섬에 가고 싶다> - (글쓴이 알 수 없음)


모듬회 접시 한 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난자 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닿고 싶다 (전문)

제목부터 익숙한 김언희의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고약하고 도발적이다. 이미 하나의 에
피그람이 되어 있는 정현종의 고전적인 <섬>을, 김언희는 말장난으로 뒤틀고 엎어버린
다. 패러디란 어쨌든 원래의 시에 시비를 걸어보는 것이고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음 인용되는 정현종의 시와 김언희의 패러디는 얼마나 이질적인
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은 누구도 이 시의 '섬'을 바다 한가운데 실재하고 있
는 섬이라고 읽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과 거기서 오
는 고독감을 섬만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이미 저마다 하나의
섬이다. 그러므로 정현종의 '섬'은 섬이 아니면서 섬이다. 김언희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에는 <섬>의 고고함과 그래서 더욱 깊어지는 외로움이 없다. 또한 고요하게 일렁이는 파
도 속에 오롯이 놓여있는 섬의 靜謐함도 없다. 대신, 그 섬에서 잡아올린 물고기(이미 회
가 되어 접시에 올라온)가 있을 뿐이다. '섬'은 말 그대로 실재하는 섬, 지정학적인 위치
를 가진, 물고기의 서식처인 섬이 된다. 고고함이나 고독이라는 단어 역시 김언희에게는
너무 고전적이고 고급한 것이다. 그녀의 시에는 그 대신 남의 살을 날것으로 씹어먹는 대
중의 속된 嗜好가 모듬회 접시 위에 올라앉아 있다.

<섬>의 고고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모듬회 접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혹은 사람들은 '회'(사람)라는 이름으로 모듬회가 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인
간사회!) 그들은 이미 '난자 당한 살점'을 천연덕스럽게 붙이고 살고 있다. 피를 흘리며 혹
은 피 한방울 없이, 피가 없는 살만으로.

'난자 당한 살점'의 주인이 회가 된 물고기이고, '섬'을 횟감이 된 고기의 뼈대라고 해보
자. 자기 살이 저미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저며져 더 이상 자신의 살이 아닌 살들을 위에
가지런히 얹고("난자 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누워있는 고기의 멍한 눈, 그것의 뼈.
(실제로 모듬회는 이처럼 고기의 뼈 위에 살점들을 얹어내지는 앉는다)그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은 채식주의자거나 어설픈 애니미스트 혹은 오지랖이 넓은 감상주의자이다.
물론 김언희는 이런 류의 인간들과는 거리가 멀다. 물고기의 뼈가 그것의 존재의 핵이며,
사람이라면 실존이며 등등이라고 하더라도, 김언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뼈가 아니라
그것에 '닿는' 행위이다. 회를 앞에 놓고 살이 잘 발리워진 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의
눈이고, 회를 먹는 것은 나의 입이며, 그것에 닿는 것은 나의 손이다. 그것이면 끝난 것이
다. 핵심, 중추, 정체성과 같은 뼈대와 관련된 모든 의미들은 애시당초 논외이다.

김언희의 상상력은 오직 육체, 살의 지대로만 길을 뚫고 있다. 고독한 혼자이든 떼거리 지
은 무리이든, 중요한 것은 혼자이거나 무리이거나 그들이 육체적으로(살적(的)으로 정확
하게는 성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인간의 육체를 철저하게 섹스와 연관된
것만으로 취급한다. 인간의 삶은 오직 육체이고, 육체에 홀린 또 다른 육체이고, 그 육체들
이 얽히고 설켜 벌이는 대낮의 정사이다. 서로를 노려보다 격렬하게 뒤얽히고, 떨어져 잠
시 휴전하다 다시 얽히는 살들의 전쟁. 그녀의 시는 온통 피와 땀과 정액과 난자들이 비릿
하게 범벅된 살과 살의 전쟁이다. 그녀의 시는 그것부터가 색적(色的)이며, 과격한 경우
오직 성기만이 있는 육체를 연상시킨다. 성기가 말을 하고 성기가 밥을 먹고 성기가 섹스
를 하는 완전한 성의 천국. (그러나 이 살들의 전쟁을 노출시킨 김언희가 무엇을 감지하
고 지향하는지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한다.)

육체적인 것으로만 상상의 촉수를 뻗는 김언희의 특징은 같은 지면의 <여섯시가 되었나>
에서도 반복된다.


여섯 시가 되었나
아직 아니다

살덩이는 털 속에서 자고 있다

여섯시가 되었나
아직 아니다

두개골의 천장에서 손바닥만한 회반죽이, 펄썩
떨어진다

여섯시가 되었나
아직 아니다

똥이 목젖까지 차 오른다

여섯시가 되었나
아직 아니다

빗물받이 드럼통 속을 둥둥 떠다니는 쥐새끼
대가리 떨어진 쥐새끼

여섯시가 되었나
아직 아니다

점점점 벌어지는 기계의 목구멍

여섯시가 되었나…… (전문)

- 아침 여섯시, 깨어나야 할 시간. 자명종이 울릴 시간. 이 시는 바로 그 여섯시 직전의 상
황이다. 살덩이는 털 속에서 자고(성기의 표현), 똥은 목젖까지 차오르고(아침의 배변을
기다리고 있음) 아직은 잠에 몰입해있는 나. 나의 정체성은 살덩이와 똥과 빗물받이 드럼
통. 똥구멍이 목젖과 같고 두개골은 회반죽, 장기(臟器)는 빗물받이 드럼통(고유의 도구성
을 상실한 채 소품처럼 쓰이는). 혹은 이런 드럼통 신세. 이런 장기와 똥, 살을 거느리고
다니며 대가리는 떨어진 한 마리 쥐새끼. 벌어지는 기계의 목구멍(자명종 시계의 벨소리
가 임박), 여섯시가 되었나 ……(되었다. 이 부분에서 벨소리!)

나의 정체성은 대가리가 떨어진 쥐새끼와도 같은 것으로, 대가리는 이성이나 논리, 정신
등 육체와 상대되는 그 모든 것을 상징한다. 오직 살을 통해서만 사유하는 김언희의 입장
에서라면 대가리는 열 번 백 번 떨어져 마땅할 것이다. 내 몸에서 자란 독버섯으로 국을 끓
이고 그것을 내 입에 넣어주며 살이 죽기를 고대하는 대가리. 그러나 내 혀에는 벌써 독버
섯이 죽음의 모양을 하고 솟아 있다가 대가리까지 달고 메롱 얼굴을 내민다. 순간 나의 이
성의 대가리는 희화화된다. ("대가리들, 내 몸에서/ 버섯을 딴다 붉은/ 버섯국을/ 끓인다
독버섯 국을/ 받아먹는 내 입 속에 버젓이/ 버섯 하나 돋아 있다/ 혓바닥 위, 저// 검붉
은, // 버섯 대가리,"- <버젓이>)

김언희의 상상력은 오직 육체와 性으로만 열려있다. 무엇을 보든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바
라볼 수 있는 것은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기발한 재주이다. 그녀의 시에서 육체는 정신에
비해 열등하거나 천박하지 않다. 그곳은 오직 육체가 뿜어내는 살 냄새만이 있는 가치 평
가를 대동하지 않는 영역이며, 말 그대로 살들의 세계이다. 그녀의 일면 편집광적인 시 쓰
기는 오직 살만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육체까지를 해체할 때 오는 섬뜩한 죽음, 정체성의
물질적인 파괴로 읽힌다. 이따금씩 어떤 시는 정열(?)이 지나쳐 도색잡지를 볼 때와 같은
불쾌감과 혐오감을 주지만 말이다. *



[작가 소개] * 정현종(鄭玄宗) -----------------------------------

시인 정현종은 1939년 12월 17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65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54년, 65년 『현대문학』에 「화음」과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이 각각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했고, 1972년 첫시집 『사물의 꿈』으로 4·19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65년 <60년대 사화집> 동인, 66년 <사계> 동인. 시집으로 『고통의 축제』(민음사, 1974), 『나는 별아저씨』(문학과지성사, 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문학과지성사, 1984), 『거지와 광인』(1985),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세계사, 1989), 『한 꽃송이』(문학과지성사, 1992), 『세상의 나무들』(문학과지성사, 1995), 『갈증이며 샘물인』(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의 황홀:삶과 시에 관한 에세이』(세계사, 1989) 등이 있다. 1999년에 『정현종 시전집 1, 2』(문학과지성사, 1999)가 출간되었으며, 정현종의 시 세계를 조명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정현종의 시 세계』(이영섭 외, 문학동네, 1999)와 『정현종 깊이 읽기』(이광호 편, 문학과지성사, 1999)가 있다. 그리고, 1992년 제4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5년 <제40회 현대문학상> 수상. <대산문학상>에 이어, 2001년 중앙일보사의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 시론집으로는 『숨과 꿈』(1982), 『시의 이해』(1983), 『관심과 시각』(1983)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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