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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許蘭雪軒과 小蘭雪(景蘭)  敦篤虛靜

부산인터넷뉴스 2007. 5. 1. 18:06
[文]許蘭雪軒과 小蘭雪(景蘭) 

 

지난 6월에 낸 <길이 멀어 못 갈 곳 없네> (당대 최고의 석학이던 신라 최치원의 문장 '무릇 길이 멀다 해도 못 가는 곳 없고, 나라가 다르다고 못 갈 나라가 없다 - 夫道不遠人 人無異國'에서 차용)라는 책을 내준 출판사(어진소리)에서 중국시인총서라고 해서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번역하는 총서를 발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값을 아주 싸게 해서 제공하는 바람에 집에 받아놓고 두다가 모처럼 시간이 나서 제목이라도 보자며 훑어내려 가다가 보니 <소설헌 시선(小雪軒詩選)>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설헌'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작은 설헌'이라는 뜻일텐데...... '설헌' 하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밖엔 없는데?....하며 열어본 즉 뜻밖에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마치 금광을 발견한 듯한 기쁨에 젖을 수 있었다.

설헌(雪軒)이란 이름은 호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경란(景蘭)이라는 여성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에 여성이 들어가다니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읽어가다 보니 이 여성의 아버지가 조선인이다. 우리나라 선조 때에 허순이라는 중국어역관이 중국의 금릉(金陵) 땅에 흘러 들었다가 중국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라고 한다. 그런데 호로 쓴 '설헌'이라는 단어는 정말로 우리 조선의 뛰어난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허난설헌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자기는 그 뒤를 잇는 작은 설헌이 되겠다고 해서 붙인 호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로 멀리 중국의 한 아가씨가 조선의 여성시인을 그처럼 흠모하게 돼 호까지 따라했는가? 어쩌다가 그런 작품이 중국의 대표적인 시로 해서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있는가?

소설헌 경란은 어릴 때부터 모습이 어여쁘고 솜씨가 남다르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7살이 넘으면서 능히 시와 문장을 잘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가 일찍 죽어 외갓집인 사씨(史氏)집에서 길러졌다. 이윽고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시집갈 생각은 않고 항상 멀리 조선에 남겨진 친척들만을 생각하며 고국인 조선을 볼 수 없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의 시문을 짓곤 했다고 한다.

이럴 때에 중국에는 허난설헌 바람이 불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으로 갔던 주지번(朱之蕃)이 선조 6년인 1606년 허난설헌의 남동생인 허균으로부터 허난설헌의 시문을 받아서 중국으로 가져 온 뒤 허난설헌이 죽은 지 18년이 되는 1608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다. 젊은 여성의 시가 너무나 좋아 중국인들을 사로잡는 동안 소설헌 경란도 이 때에 난설헌의 얘기를 듣고, 직접 그의 시문을 보고는 그의 모든 시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그 운을 빌러 123편의 시를 지어냈다. 전당(錢塘:중국 절강성)사람 양백아(梁伯雅)가 그 시들을 엮어서 『해동란海東蘭』이라고 하였다.

물론 허난설헌은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명종 18년인 1563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딸로 태어나 당대 석학인 아버지와 오라버니,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 너머로 글을 익혔는데도 글재주가 뛰어나 여덟살 때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빼어난 미모에다 글재주까지 있어 모두다 침을 흘리는 가운데 15살 때에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을 가서 딸과 아들을 낳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태만에 연달아 모두 잃고 만다. 이 때의 절절한 아픔이 시로 남았으니


哭子 아들을 곡함
                         허난설헌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엔 아끼던 아들을 보내었네.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
슬프고 슬프다, 이 광릉 땅에 두 개의 무덤이 마주 서 있네.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
백양(白楊)나무 숲엔 쓸쓸히 바람 불고 도깨비불은 송추(松楸)에서 번쩍인다.
紙錢招汝魂 玄酒奠汝丘
지전(紙錢)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현주(玄酒)를 너의 무덤에 뿌린다.
應知弟兄魂 夜夜相追遊
응당 너희 남매의 혼은 밤마다 서로 좇으며 놀리라.
縱有腹中孩 安可冀長成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한들 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리.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
아무렇게나 황대사(黃臺詞) 읊으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낮춰 슬피 운다.


이런 글을 남긴 허난설헌은, 모든 미인의 경우처럼 일찍부터 자신이 오래 살 수 없음을 예견하고 23살 때에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산산>를 지었고 불과 4년을 더 살다 27살때인 1589년(선조21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난설헌이 죽은 다음해인 1590년 11월 남동생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남편 김성립은 임진왜란에 참가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허균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줌으로서 동양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사연을 들어 알고 있는 소설헌은 난설헌의 설헌이란 글자를 따서 소설헌이란 자호를 짓고 글을 지으며 사모하는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사실은 소설헌의 원래 이름도 잘 모르는데, "경란(景蘭)"이라고 한 것은 "난설헌을 사모하고 그리워한다(景慕蘭雪軒)"는 뜻으로 부른 것이라고 한다. 같은 양천 허씨에다 관향도 우연히 같아서 늘 몸을 어루만지며 슬퍼했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난설헌이 스무일곱에 세상을 떠났듯이 나이가 스물 일곱이 되자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문을 닫은 채 향을 사르며,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올해에 내가 반드시 세상을 떠날 것이다"고 말했다. 이 해가 무사히 지나가자 도리어 슬퍼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잃은 듯이 "나는 그저 평범히 태어난 인간이구나"하고 말하고는 곧 광려산(匡廬山)이라는 데로 들어가서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죽었다고 한다.

난설헌의 인생과 소설헌의 인생은 마치 판박이인 것 같다. 일찍이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을 때 이야기이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어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다.

소설헌도 남편의 용모가 준수해서 자랑할 만 하지만


一生耽遊獵 馳馬上峻坂
평생을 사냥하며 놀기를 좋아해 말달리며 높은 언덕만 오르네
恩愛何遷差 佳期且婉晩
사랑은 어찌하여 식어만 가고 아름다운 기약은 늦어만 가나
覆水難再收 斷雲不復達
엎지른 물 다시 거두기 어렵고 끊어진 구름 잇기 어려운 법
芝蘭與玉樹 慙愧謝家玄
미리 난초와 옥수를 심은 사현에게 얼마나 부끄러운가


라며 자기를 두고 나돌아다니는 남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면에서 조선과 중국으로 떨어져 산 난설헌과 소설헌은 같은 시대의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도덕적인 엄숙주의로 일관되었다. 따라서, 남존여비 사상으로 해서 여성은 남성에 예속된 존재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초기에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당시의 남편들에 대한 원망과 기다림이 절절하게 묻어나다가 결국에는 이 세상을 초탈하고 싶은 마음에 신선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난설헌은 실제로 조선 사회에서는 어떤 공간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내로서의 공간, 며느리로서의 공간, 어머니로서의 공간 등 그 어느 공간도 그녀에게는 닫혀져 잇엇으며 그녀의 존재는 사실상 현실에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녀의 세계가 환상으로 가는 것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항의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感遇 4 만남4

夜夢登蓬萊 꿈속에 봉래산에 올라가서
足 葛 龍 맨발로 갈피의 용을 탔다네
仙人綠玉杖 파란 옥지팡이 짚은 신선이
邀我芙蓉峰 부용봉에서 나를 맞이했다네
下視東海水 아래로 동해를 내려다 보니
澹然若一杯 담담하기 한 잔의 물과 같네
花下鳳吹笙 꽃 아래서 봉황이 피리를 부니
月照黃金  달빛은 황금잔에 비치네


그런데 문학적으로 두 설헌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당시 사회가 남녀유별로 찌든 폐쇄사회였기에 여성들의 문학, 한문학은 정서적인 차원에 머무는 수준이 많아 시대를 넘는 환상성을 지닌 작품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조선조 여성문학의 대표자인 난설헌만이 환상의 영역까지 작품의 깊이를 확장했던 유일한 여성이라고 한다. 난설헌의 〈유선사 遊仙詞〉가 바로 그런 작품인데, 이 난설헌의 〈유선사〉78수에 차운(次韻)한 소설헌의 78수의 작품은 광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냄으로서 그 경지가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遊仙詞 74     

               소설헌

床上春眠暫化烟 평상 위 봄 잠에 금방 연화계로 변해
午鷄爭唱芥花田 낮닭들이 겨자 밭에서 울어댄다
覺來記憶三淸事 꿈을 깨어 삼청의 일 기억해보니
笙笛聲中度一年 생황, 피리 소리로 일 년이 지났네



난설헌과 소설헌을 굳이 비교한다면, 난설헌 쪽이 묘사가 더 다양하고 넓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 반면 소설헌은 그에는 못미친다는 평이지만, 어쨌든 두 허씨 여성이 한국과 중국에서 각각 시문으로 이름을 드날리기는 정말 쉽지 않고, 이것이 단순한 인연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겠다.

난설헌의 시는 ,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널리 애송되었다. 소설헌의 시는 당시 중국에서 이미 <해동란>이란 이름으로 시집이 간행될 정도라면 거기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소설헌의 시들은 1913년에 우리나라에서도 '신해음사'란 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나와 , 일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바 있는데, 이런 절절한 스토리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강남대학교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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